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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가 살았던 장춘 「위황궁」/마지막황제의 회한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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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가 살았던 장춘 「위황궁」/마지막황제의 회한 곳곳에

입력
1995.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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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엔 “부끄러운 력사잊지말자” 경구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명화 「마지막 황제」의 실제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던 위황궁. 이 궁은 32년부터 45년까지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세운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였던 푸이(부의)가 살았던 황궁이다. 중국 지린(길림)성 창춘(장춘)시 북쪽에 있는 위황궁은 그러나 일국의 황제가 살았던 황궁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부의가 중국황제가 된 것은 3세때. 1908년 큰아버지인 광서제가 죽자 3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라 아버지 순친왕의 섭정을 받으며 3년간 황제로 있었다. 하지만 부의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듬해인 1912년 제위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그의 퇴위는 260여년간에 걸친 만주족의 중국지배는 물론 2천여년간에 걸친 오랜 왕정체제가 끝났음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부의와 그가 가장 사랑했다는 3번째 부인 단위링(담옥령), 후궁 완룽(완용)과 함께 기거했던 집희루에는 이들이 생활하던 모습을 담은 실제크기의 밀랍인형들과 함께 이들이 남긴 사진과 편지, 부의가 썼던 유리안경 등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만약에 혁명(신해혁명)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도 중국의 황제일텐데…」부의의 글들중에는 쫓겨난 황제신세를 한탄하며 자신을 몰아낸 세력들을 원망하는 내용이 곳곳에 눈에 띈다. 자금성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왜소한 규모의 위황궁에는 중국근대사의 격랑속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부의의 비운과 회한이 구석구석에 짙게 배어 있다.

부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45년8월에 소련에 억류됐다가 50년 전범재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송환됐다. 59년 특사로 풀려난 다음 북경에서 한 식물원의 기계수리상점에서 일했던 그는 「황제에서 시민으로」라는 자서전을 남기고 67년 북경에서 숨을 거뒀다.

위황궁은 일본이 중국침탈을 위해 세운 만주국의 꼭두각시황제가 살았다는 뜻에서 중국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중국사람들에게 위황궁은 역사의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현장이다. 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에는 「위황궁유적은 역사를 잊지 말고 후대에 알려준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창춘=김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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