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참사로 놀란 가슴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또 놀라운 사태가 벌어졌다. 전직대통령의 4천억 가·차명예금 발언은 온 국민을 의혹, 경악, 개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발언내용이 진실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그렇지 않다 해도 발설자가 한 나라의 국무위원이요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이기에 충격은 더욱 크다.한편 이 발언이 즉시 전파를 타고 온 세계에 쏟아져 나갔을 터이니 나라망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그 진실 여부의 어느 쪽이든 우리는 분명히 삼등국가로 전락된 느낌이다. 이 사건을 아무리 없었던 일로 하려 해도 되지도 않을 일이며 오히려 의혹만 증폭시킬 뿐일 것인즉 그 실과 허를 철저히 가려내야 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남에 대해 제 아무리 「부패공화국」이 아니라고 변명한들 그 오명은 씻기 어렵게 되었고 그 발설자의 해명대로 시중에 떠도는 풍문이라 해도 문제의 심각성에는 다를 바가 없다. 얼마전 베를린의 어떤 부정부패추방운동기구가 국가청렴도를 조사하였다 하여 조사대상 41개국중 우리가 27위이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중 최하위라고 보도된 바 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대형사고의 빈발 못지 않게 창피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무리 정파간의 갈등분열과 힘겨루기의 어수선한 정국이라 해도 만일 이 발언의 진위가 가려짐없이 묻혀버린다면 국내외적으로 한심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며 정부의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이번에는 27위가 아니라 그 순위가 곤두박질이 될 것이다. 그 파장이 어디까지 가든 구애됨이 없이 진상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져야 한다.
지난 수년간 숱한 큰 사고가 날 때마다 거의 그 뒤에 관련공무원과 부정유착이 있었다 하여 떠들썩했다. 공무원과의 부정결탁없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함이 온 국민의 상식으로 되어 있고 간혹 적발된 공직자는 그저 악운의 희생자일 뿐인데 왜 상부의 큰 부정은 눈감느냐고 억울해 한다. 그리하여 그 처벌은 일과성 경고에 그치고 그 때만 지나면 모든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져 유사한 부정은 되풀이되어 푹푹 썩는 냄새가 도처에서 진동을 한다. 이 사회에는 부패의 세균이 마구 퍼져 나가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의연해 하니 지금 우리는 이 무서운 세균에 감염되어 있다.
6·27지방선거결과 집권당 안에서 「민심이반」의 자성론이 나왔다. 현정부는 집권초 개혁의 깃발아래 사정의 큰 칼을 휘둘러 나름대로 많은 국민의 박수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 효험은 국민의 피부에 와닿지 못했고 요란한 나팔소리만 스쳐 지나갔을 뿐 사회가 맑아간다는 아무 징후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 과거청산식의 회고적 부정척결은 사회풍토 개선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았다. 며칠전 공보처의 여론조사결과 응답자의 절대다수가 부패근절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고 최근 김영삼대통령은 외신에 개혁은 계속 추진될 것이라고 강도높게 말했다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탈된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광범위한 사면이 단행될 것이라는 소문도 나와 있다. 행정수반의 사면권이 민심을 한 곳에 끌어 모으는 처방으로 쓰여진다면 형사사법의 권위와 사회정의는 무너져 나라의 기강은 더욱 풀어지게 마련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사회기강을 바로세워 크고 작음을 가림이 없이 부정부패를 철저히 배격하는 올바른 의식이 이 땅에 깊숙이 뿌리박힐 때까지 꾸준히 싸워나가는 일이며 그 중에서도 공직자의 부패근절이야 말로 개혁작업의 중핵이 되어야 한다.
지난날 미국의 카터대통령이 어느 결혼식장에 두 아들과 함께 전용기를 타고 갔다 하여 아들들의 비행기요금을 정부에 납부했다는 일이 기억되지만 최근 미국상원의원이 한번에 50달러 이상의 선물과 한 해에 한 사람으로부터 도합 1백달러이상의 선물을 받지 못하게 스스로 규칙을 정했다 한다. 부유한 나라의 그들이 그와 같다면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더구나 남보다 엄한 처벌법규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공직자가 호사스러운 향응이나 선물을 뇌물로 받았다는 것만으로 벌을 받은 일을 듣지 못했고 뇌물액수가 적다 하여 의례적인 관행으로 돌리기가 일쑤라 하니 우리는 만성적인 뇌물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계화를 외치고 그럴 듯한 제도를 만들어 놓아도 이를 다루는 공무원의 기강이 문란할 때 부정은 횡행하여 급기야는 쇠망의 길로 치닫게 마련이며 이는 역사의 교훈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패라는 생과 사가 갈리는 난치병에 걸려 있다. 그 병을 고치는 명의는 오히려 집권자나 정부가 아니라 결국은 우리들 국민 스스로인 것이다. 늦었지만 과감히 다 함께 나서야 할 때이다.<박승서 변호사·전 대한변협회장>박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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