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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나 수복 투지만 크로아 대통령(뉴스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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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나 수복 투지만 크로아 대통령(뉴스 메이커)

입력
1995.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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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신봉… 정치생명건 군사도박 성공프라뇨 투지만(73)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크로아티아군이 91년 독립이후 4년동안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던 남부 도시 크닌을 탈환한 바로 다음날인 6일 크닌으로 날아가 거기서 펄럭이는 크로아티아 국기에 키스했다. 그는 감격에 찬 어조로 『모든 크로아티아 국민과 마찬가지로 나는 크닌에 다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면서 『오늘은 크로아티아에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크닌시 함락이 상징하는 세르비아계 점령지역 크라이나의 수복은 그가 반평생 추구해온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정점이다. 독립직후 벌어진 내전에서 세르비아계에 빼앗겼던 크라이나 지역을 되찾음으로써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계에 당했던 수모를 갚는 통쾌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와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는 세르비아는 1차대전 후 유고왕국으로 통합됐지만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반목은 사라질 수가 없었다. 이러한 반목은 결국 2차대전 중 나치의 크로아티아 괴뢰정권이 세르비아계 수십만을 학살하는 참극을 초래했다. 침략자에 부역한 크로아티아인들은 2차대전후 공산 유고가 들어서자 차별을 받는 것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때문에 유고연방 분열이후 세르비아계의 발호를 가장 우려했던 것은 크로아티아였다. 따라서 크로아티아의 이번 공격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투지만대통령은 자칫 자신의 정치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이번 군사 도박에서 성공을 거두기위해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병력을 10만에서 12만으로 증강하고 장비와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세르비아계의 공세에 몰린 보스니아 정부군과 군사협력도 강화했다. 세르비아계의 확장을 저지한다는 명분아래 미국과 독일의 암묵적 동의까지 얻어낸 뒤 그는 지난 6월 세르비아계에 크라이나를 포기하고 자진해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세르비아계는 거부했고 그는 전군에 공격을 명령한 것이다.

투지만은 2차대전 중 19살의 나이로 티토 전 유고 대통령의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나치 점령군과 싸웠고 전후 티토 공산정권 아래서 빠른 속도로 출세길을 달려 1960년 최연소 장성(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계가 주도하는 연방에서 크로아티아인들이 당하는 민족차별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이듬해인 61년 군을 떠나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독립을 주장하다 72년과 82년 반혁명죄로 각각 2년, 3년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그는 90년 크로아티아민주동맹당(HDU)을 창설, 크로아티아공화국 총선에서 집권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독재자이지만 민족주의자로 국민 사이에 인기가 높다. 군 출신다운 꼿꼿한 자세와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옷차림, 전부 빗어넘긴 흰 머리칼이 아주 인상적인 완벽주의자로 알려져있다.<오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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