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히로시마(광도) 원폭투하 50주년(6일)을 앞두고 미일간 원폭의 의미와 평가 논쟁이 불붙고 있다. 일본은 원폭의 참혹상을 세계에 알려 일본이 2차 대전(태평양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최대 피해자라는 점을 부각시키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대대적 선전공세로 2차 대전의 「반인륜적 가해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미국은 원폭 사용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패자의 변」을 일축하고 있다. 양국의 언론들까지 가세해 불붙고 있는 양측의 시각을 조명해 본다.<편집자 주> ◎미국의 입장/“희생 최소화 불가피한 선택”/동경 진격했다면 수백만 전사 편집자>
「원자폭탄을 투하하지 않았어도 일본이 쉽게 항복했을 것인가」하는 가설은 최근 미국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화두이다.
미국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불필요한 과다 폭력사용론」을 단호히 거부한다. 원폭으로 인해 2차 대전이 조기종결됐으며 잠재적 희생을「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논리에 이의가 있을 수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단적인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작전명 「올림픽」과 「코로넷」으로 명명된 두차례의 일본본토 공격계획이다. 미국은 45년 5월 나치독일의 심장부인 베를린에 연합군측 소련군이 진격한 후에야 유럽지역에서의 2차대전이 종결지어진 것을 예로 들면서 일본도 본토가 점령되지 않는 한 끝까지 항전, 많은 희생자를 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5년 6월 마침내 일본의 관문인 오키나와(충승)를 점령한 미국은 일본본토에 대한 최후 공세에 돌입할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 남단 규슈(구주)를 목표로 했던 「올림픽」 작전은 그해 11월 1일로 예정됐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총지휘로 진행될 이작전은 상륙을 감행할 지상군만도 76만6천여명에 3·5·7함대등 3개 해군함대가 투입되는 대규모 상륙작전이었다.
예상되는 일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대본영은 본토방위의 보루인 규슈에 14개 사단을 비롯한 총73만5천명의 병력을 밀집시켰다.
오키나와 점령에 5만명의 병력을 희생시킨 미국은 규슈 점령에만 10만명이상이 희생될 것으로 예측했다. 당시 미합참이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연합군 전사상자 50만명이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 민간인은 15만명 이상 희생됐다. 작전강행시 예상된 일본인의 피해는 50만∼수백만명선이었다.
이어 도쿄(동경)를 직접공격해 들어가는 「코로넷」작전(46년 3월1일 예정)이 강행됐다면 양측의 피해는 천문학적이었을 것이라는 게 미국측 주장이다. 작전에 앞서 대공습이 본격 개시됐다면 일본인의 피해는 배가됐을 것이다.
미국은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결정적인 일본의 암호문을 해독해냈다. 「모든 군인은 최후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항전하라」는 지시였다.
7월 16일 뉴멕시코 사막에서 가공할 위력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이「맨해튼계획」의 책임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폭투하로 예상되는 희생자 수를 2만명으로 추산,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의 재가는 당연했다. 단지 효능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못했던 미국은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에 자신들도 놀랐다.
히로시마의 경우 8만명이 즉사했으며 그해 연말까지는 6만명이 추가로 숨졌다. 미국은 핵폭탄투하로 인한 인도적 책임때문에 일본 전후 복구에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뉴욕=조재용 특파원>뉴욕=조재용>
◎일본의 분위기/“소 견제 전략에 당했다” 부각/피해만 강조 침략전 책임회피
4일 소집된 일본 임시국회는 중·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중국의 핵실험에 항의하고 프랑스의 핵실험에 반대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적어도 핵문제에 관한 한 모두가 한목소리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똑같이 「평화」를 내건 지난 6월의 하나마나한 「전후 50주년 결의안」이 그나마 야당인 신진당이 불참한 가운데 통과된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가해자로서의 인식이 극도로 희박한 반면 피해에만 집착하는 일본식 사고의 극점은 오는 6일로 50주년을 맞는 히로시마(광도)피폭기념행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본은 「종전 50주년」의 의미보다는 「피폭 50주년」의 쓰라린 기억을 반추하고 있다. 히로시마의 참상을 방패로 침략과 만행을 감추는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일본언론들은 이미 지난 봄 미국의 원폭기념우표 발행계획을 대대적으로 비난하면서 여론을 환기시켰고 그 계획이 일본정부의 항의로 취소되는 과정을 상세히 추적보도했다. 또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주최로 올여름 개최되려다 미 재향군인회 등의 항의를 받고 무산된 「원폭전」을 아쉬움속에 추적했다.
문제의 원폭전이 「원폭이 결과적으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고 일본토상륙전으로 인한 인명살상을 막았다」는 미국 일반인들의 상식을 수정, 「전쟁종식보다는 전후구도를 염두에 두고 소련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시각을 제기하려는 기획이었다는 설명도 일본국민에 알려졌다.
일본 언론은 최근 들어서도 이같은 수정주의 시각을 입증하기 위해 당시 미관계자들의 증언을 잇달아 보도하고 있다. 당시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참여했던 공군관계자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엄청난 결과를 보고 후회했다』는 증언이 소개되고 관련서적에 수없이 나와 있는 「미원폭투하의 진정한 이유」에 관한 증언도 홍수를 이루고 있다.
종전 50주년을 계기로 핵문제를 되돌아 보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보도의 주류가 『미국이 불필요한 핵공격을 감행했고 히로시마의 참상은 그런 우연한 선택의 결과로는 너무하다』는 비난과 하소연에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 원폭개발계획에 참여했던 스즈키(영목) 당시 육군중령이 지난달 일본외신기자클럽 기자회견에서 『일본도 원폭개발을 시도했으나 우라늄235의 확보와 농축에 실패해 불발했다』고 증언한 내용은 일절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독일의 U보트가 일본측 요청으로 우라늄을 싣고 항해하던중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만 짤막하게 보도됐을 뿐이다.
피폭자의 고통스런 과거가 경쟁적으로 반추되는 일본내에서 일본에 끌려와 있다가 똑같이 피폭 고통을 당하고도 국적의 차이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한인 피폭자에 대한 조명은 어디서고 찾아볼 수 없다.<도쿄=황영식 특파원>도쿄=황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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