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발발하기 1년전, 민족의 비극을 예고라도 한듯한 총성이 울렸다. 1949년 6월26일 온 나라가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겨레가 울었다. 해방이후 국민장 국장 사회장으로 민족의 지도자를 저 세상에 보냈지만 백범 선생의 영결식 만큼 통곡을 자아낸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흉탄에 쓰러지기까지 김구 선생의 일대기는 그대로 야인의 삶이었다. 8·15광복후 귀국한 그의 모습은 바로 서민 그것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자리를 탐한 일이 없다. 임시정부 청사의 수위직을 자청한 소탈한 성격이 지금도 우러러보인다. ◆백범 선생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 일화에 담긴 이야기는 선이 굵고 대범하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한 것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다. 8·15 환국뒤에 설렁탕집을 자주 찾은 서민적인 생활은 해방시대에 잊지 못할 지도자상의 한 단면으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의 생애에서 흠 잡을데가 없을 만큼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남겼다. ◆이달은 광복의 달이다. 8월의 문화인물과 독립운동가로 백범 선생이 선정되었음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올해는 광복50돌로 역사적인 해방의 달을 맞았다. 사람에 따라선 그와 노선을 달리 했거나, 또 역사적인 평가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만은 명백하게 밝혀둘만 하다. 독립운동사에서 백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우리 역사에 이런 출중한 인물이 있었음이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거인의 모습은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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