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차이 점진적 해소 필요/기존합의 성실이행이 지름길한반도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북한 양측의 통일방안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남한의 통일방안은 김영삼대통령이 94년8월15일 광복49주년 기념식 경축사에서 제시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이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이다. 89년9월11일 노태우대통령이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일관성을 가지는 이 방안은 통일과정을 (1)화해·협력단계 (2)남북연합단계 (3)통일국가단계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북한의 통일방안은 80년10월10일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김일성주석이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를 하면서 선을 보인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이다. 이 방안은 『북과 남이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예상하고 있다.
북한이 제시한 고려연방제안은 현 실정하에서 남북의 「제도적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 연방을 통한 「민족적 통일」을 표방하고 있는 점이 현실적이다. 남북의 사상, 제도 등의 차이와 독자성을 인정한다는 취지도 긍정적이다. 이 안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북의 사상,제도를 그대로 두고 하나의 연방국가를 형성해 통일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쪽 제도가 바뀌는 것을 요구하는 등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이는 「남조선혁명」의 논리와 대동소이하다. 이 안은 또 제도적 통일을 장기적인 목표로도 설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완전한 통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충분히 반영돼 있지 않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남한의 민족공동체안은 우선 점진적 접근방법만이 분단의 고통을 덜고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전제하에 3단계를 설정한 것이 실용주의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또 이 방안의 첫단계인 화해·협력은 이미 법적 제도적 기반이 준비되었으므로 양쪽의 정치적인 의지만 있으면 어느때든지 시작할 수 있다. 중간단계인 「남북연합」은 원칙적으로 남북간에 많은 합의점을 찾은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족공동체안이 목표로 삼고 있는 통일국가 즉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자유·복지·인간존엄성이 보장되는 선진민주국가」는 북한이 표방하는 「우리식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흡수통일의 청사진이라는 비판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가지 통일방안은 모두 통일의 필요성, 당위성, 필연성까지 인정하고 있으며 분단의 장기화로 인한 사상, 이념, 체제상의 차이가 커진 점을 서로 인정하고 있다. 또 통일 성취과정에서 상대방체제가 변하는 것을 필요한 조건으로 보고 있다. 차이점은 남한이 남북연합이란 중간단계를 설정, 점진적 접근방법을 내놓고 있는 반면 북한은 이를 생략한 일괄적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 민족공동체안이 그리는 통일국가의 미래상은 사실상 현 남한체제의 연장인 반면 고려연방제안은 북의 체제를 보존하면서 남북의 힘을 모아 연방국가의 위상을 크게 제고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첫 걸음은 민족공동체안에서 명시한대로 화해와 협력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통일로 가는 길은 남북연락사무소 및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된 5개 공동위원회 등 기존 합의서들의 성의있는 이행으로써 닦을 수 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남북정상회담도 가능해질 것이며 여기서는 남북연방 또는 연합문제를 토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이 구상하는 연방과 남이 생각하는 「남북연합」은 모두 양쪽 체제를 유지하면서 남북간 협력을 제도화하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북이 말하는 「최고민족련방회의」와 남이 구상하는 남북 의회대표들 모임은 명칭만 타협하면 될 것이다. 북이 구상하는 「련방상설위원회」는 남의 제의한 「남북각료회의」와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니 타협이 가능할 것이다. 남이 원하는 남북정상회의는 정상회담이 상호편리에 따라 반복되면 자동적으로 성립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통일의 첫걸음은 화해와 협력이다. 이를 위해 대화가 필요하고 이미 발효한 합의서들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시급하다. 국제환경의 충격적인 변화에 적응하여 남북도 적대관계를 친선 협력관계로 전환시키고 통일로 가는 길에 함께 행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해외대표□
고병철
59년 서울대법대 졸업
63년 미국 코널대 행정학 박사
65년 루이지애나대 일리노이대 교수
77∼87년 미국아시아학회 한국위원회 위원장
91년 서울대 정치학과 교환교수
◎남북 통일학술회의 결산/학자들 주도 성공적개최 큰의의/토론내용·수준 예상밖 성과/장소 교환개최도 깊이 논의
1일 중국 베이징(북경)에서 성공리에 끝난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는 우선 남북학자들이 분단후 처음으로 학술심포지엄을 공동주최 했다는데 그 의미를 둘 수 있다.
그동안 남북학자들이 여러차례 국제학술세미나에 함께 참석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3자가 마련한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남북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인식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는 통일문제가 이번 회의의 주제였다는 점도 특기할만 하다.
이같은 학술회의 자체의 의미와 함께 「그동안 수많은 시도가 실패했는데 왜 이번의 학술회의는 성공했는가」라는 원인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미를 찾아야만 할 것 같다.
남북학자들은 「큰 차이는 줄이고 작은 차이는 일치시키겠다」는 자세로 이번 회의를 시작했고 폐막되는 날까지 이같은 자세를 지킬 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그러나 커다란 기대치를 내걸었던 어떤 회의보다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기대치는 겸손하게 잡았지만 그만큼 확실한 진전을 보았다는게 이번 학술회의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이 될 것 같다.
이틀간의 회기동안 어느쪽도 다른쪽에 설득당하지 않았고 합의된 하나의 통일방안을 만들어 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26명의 전문가들이 통일원칙, 통일방안등에 주고 받은 지식과 의견은 우선 양적으로 다른 어떤 남북학자간 접촉보다도 방대했다. 더욱이 참석자들은 회기내내 만찬등 비공식 만남을 계속하며 견해차를 좁혀 나갈 수 있었다.
토론의 깊이에 있어서도 학자들은 때로는 상대가 금기시하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남북양측의 입장을 대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북측도 이번 학술회의에 이같은 의미를 부여하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주제발표를 한 손영규사회·정치학회연구사는 『남조선학자 및 해외학자들과 주도적으로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해방후 처음』이라면서 『이번 학술회의가 통일노력을 민간급에서 결집시켜 나가는데 실로 작지않은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남북이 가지고 돌아가는 성과는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일 수 있다. 우선 남측은 북측학자들과 접촉의 기회를 확대하고 진솔한 뜻을 전했다는데서 의미를 찾는다. 북측으로서는 이른바 「8·15 통일대축전」을 앞두고 민간학자들에 대해 「단결」을 촉구할 기회를 가졌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의 이득이 곧 자신의 손해라는 냉전적인 사고의 틀을 벗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이번 회의는 하나의 선례로 남게된다. 이같은 호혜적인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남북은 서로 양보를 했다. 북측은 당초 이번 회의동안 남북학자들의 공동합의문을 발표키 위해 연방제통일을 골자로 하는 합의문 초안을 작성해와 낭독했지만 남측의 반대로 이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남북공동개최 행사에 남측 언론사인 한국일보사의 주관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번 회의의 가장 획기적인 측면 중의 하나이다. 한국일보사는 회의 개막전부터 남북학자들의 토론의 추이를 빠짐없이 보도했다.
이번 회의에 참가한 북측대표단들은 예상보다 개방되고 신축적인 입장을 보였다는게 회의참석자들의 대표적인 견해였다.
북측참가자들은 회의 첫날 참석자 전원을 만찬에 초대했다. 북한이 회담이나 회의등에서 참석자들을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라는게 북한사정에 정통한 베이징 관계자들의 얘기였다.
또 북측은 본회의동안 일방적인 주장을 펴기보다는 남측학자들의 견해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 좋은 인상을 남겼다. 북측은 남측과 해외학자 20명의 주장을 모두 녹취하고 잦은 보충질문을 통해 의문을 풀어보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 때문에 남측참석자 일부에서는 북측이 앞으로의 권력승계 또는 당대회 개최등을 통해 새로운 통일방안을 제시할 경우 이번 학술회의에서 제기된 내용이 반영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양측참가자들은 이번 회의를 일과성 모임에 그치지 않고 계속성을 확보해 나간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양측은 또 비록 첫회의는 제3국에서 개최했지만 정례화한 학술회의를 평양과 서울에서 교환개최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논의했다.<베이징=특별취재반>베이징=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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