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속보에 처음 접했을 때의 분노와 절망과 수치심은 세상이 끝장나는 것같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였다. 여태껏 살아온 안으로 곪고 겉으로 번드르르한 일상이 더는 이어질 것같지 않았고, 이어져서도 안될 것같았다. 이번에도 또 흐지부지 넘어가는 꼴을 봐서는 우리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번에야말로 관과 기업의 그 더럽고 망국적인 유착관계의 흉물스러운 원뿌리를 들춰내고 끊어버릴 때까지 우리는 다같이 분노의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처럼 느꼈었다.그로부터 한달 남짓이 지났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여전히 백화점세일은 미어 터지고, 창피해서 예정된 해외여행도 취소하고 싶다고 침통해 하던 이도 방학때 해외에 한번 못 갔다오면 개학해서 기죽는다더라는 일부 국민학교의 새로운 풍속도를 핑계삼아 가족동반으로 속속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작년보다 올해는 겉보기에 더욱 풍요해졌다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우리의 1만달러시대는 딴 나라의 1만달러시대보다 훨씬 더 요란하고 흥청거리는 게 과연 자랑일까, 특별한 능력일까.
삼풍 이전에도 무너지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안 무너지는 게 이상하다는 소리를 공공연히 할 정도로 부실한 환경에서 잘도 즐길 것 즐기면서 일상을 영위해 왔지만 이번처럼 엄청난 사건도 똑같은 전철을 밟는 걸 보니 누굴 탓하기 전에 우선 자기모멸부터 주체하기 어렵다. 어떤 불상사건 우선 자기가 면하고 나면 가족이나 친지의 안위를 확인하고 의무처럼 한바탕 격앙된 분노의 시기를 거쳐 아무리 분노해봤댔자 결국 나만 손해라는 구경꾼의 입장이 되고 만다. 왜 우리는 분노조차 아무런 뒤끝없이 부실하기만 한가. 핑계같지만 신속한 망각과 체념을 부추기는 거대하고도 조직적인 힘같은 것을 안 느낄 수가 없다. 그 중에도 신문 방송 등 언론의 조작은 전율스럽기조차 하다. 처음에 언론은 물론 국민의 분노와 양식을 앞장서서 대변하면서 정당한 여론을 조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중에도 특히 영상매체는 국민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속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속성상 오락물보다 몇배 치열한 경쟁체제로 돌입했다. 그 처참한 비극의 현장에서도 리포터의 목소리는 신바람에 넘쳤고 보다 현장감있는 화면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구조대를 가로막기 일쑤였다. 시청자는 어느 틈에 사건의 중대성이나 핵심에서 비켜나 구경꾼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미화원들이 한꺼번에 구조됐을 때 언론은 그 공포의 폐허에서 성공적으로 축제분위기를 연출했고, 마지막으로 거의 생존가능성을 믿을 수 없게 된 시점에서 구출된 세 젊은이의 생환에 이르러서는 이 수치스러운 사건을 자랑스러운 사건으로까지 비약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들의 생환을 누가 반기고 박수치지 않으랴. 그러나 그들 또한 보호되어야 한다. 정성껏 간호하고 보살펴 점차 건강과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게 해야지 갑자기 휘황한 스포트 라이트를 들이대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들이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콘크리트더미에서 찬란하게 생환했을 때 그들의 시력보호를 위해 눈 먼저 가려주는 것은 좋은 본보기이다. 그들의 정신 역시 그런 보호를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그들 기적의 젊은이들을 역경에서 용기를 잃지 않을 본보기로 삼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 남은 것은 단지 운수가 좋았기 때문이지 남다른 노력을 했거나 지혜를 짜냈기 때문이 아니고, 출중한 효자나 효녀이기 때문에, 평범하고 건강한 가정출신이기 때문에, 하늘이 도왔기 때문은 더군다나 아니다. 그럼 기적의 생환의 몇십 몇백 배에 이르는 줄줄이 실려나온 명찰을 가슴에 단 이십대 앳된 나이의 죽음치고 효자 효녀 아닌 이가 있었으며, 서민출신 아닌 이가 있었겠는가.
살아 나온 이에 대한 지나친 찬양은 생환자 자신에게도 이될 게 없지만, 같은 처지의 자식을 잃은 유족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 옳지 않을까. 천재고 인재고 재난이 있어서는 안되는 까닭중의 으뜸은 재난은 결코 악인과 선인을 골라서 덮치지 않는데 있다. 그 완벽한 공평, 아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길 없는 철저한 불공평 때문에 재난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도 반가웠던 것은 생환한 젊은이들 덕에 오래간만에 우리 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평범한 서민층에 대한 찬양을 여러 번 들은 일이었는데 평범이 그렇게 찬양받을 일이라면 세 젊은이의 평범 또한 보호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건강한 서민층이야말로 곧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위태위태한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초공사요 철근이다. 과중한 하중 때문에 가뜩이나 허리가 휘는 철근을 빼다가 헛된 간판으로 삼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유족들의 절통한 마음에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작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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