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잊혀진 전쟁」에서 「기억할만한 전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분명 월남전 덕분이었다. 세계 제1,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국 미국은 유엔결의까지 얻어 한국전에 뛰어들었을때 이만한 전쟁이면 정말이지 5∼6개월이면 충분히 이기고 그해 크리스마스까지는 모든 병사를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었다. 그러나 미군은 1백70만의 병사를 연속투입하고 2차대전의 전 전쟁소모량에 맞먹는 폭탄을 투하했어도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5만명의 전사자를 냈고 남북분단선은 거의 그대로 존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강대국 미국의 체면 상하는 문제였다. 「잊혀진 전쟁」으로 덮고 싶었던 것이다.미국이 또 하나의 아시아 전쟁인 월남전에 뛰어들어 완패한후 미국도 전쟁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렇게 볼때 남한을 북한침략에서 지켜낸 한국전은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재인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이 「잊혀진 전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앞서 월남전 전사자 5만명을 기념하기 위해 백악관 앞의 포토멕 강변공원에 참전용사기념비를 세웠다. 패배한 전쟁을 기념하기 위한 전쟁기념비가 아니라 국가가 요구하는 전쟁에 나가 성조기 아래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한 참전용사기념비였다. 아무리 전쟁에 졌다할지라고 그 전쟁에 나간 용사들의 이름을 국가가 기억해 주지 않으면 앞으로 누가 국가의 이름으로 부르는 전쟁에 나가려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이 기념비가 건립됐다. 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도 비슷한 맥락에서 세워진 것이다. 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 조형물인 19인의 용사상도 전쟁을 이끈 장군이나 유명정치인을 상징하기 보다는 국가명령에 따라 전선에 나간 육군, 해병, 해군위생병, 공군관측병등의 평범한 병사상으로 되어있다. 미국도 한국전을 한때는 명장들 이름으로 기억하려 했다. 한국전 하면 맨 먼저 장진호 철수 작전을 들었다. 50년 10월27일 장진호방면으로 북진하던 미제1해병사단등의 2만 병력이 영하 30도 추위아래서 중공군 10사단 12만명에 의해 포위됐으나 사투를 계속한 결과 무사히 흥남부두로 철수 할 수 있었다. 이 전투로 미 의회는 해병1사단장 스미스소장등에게 단일 전투로서는 미전사상 최다인 17개의 대훈장(MEDAL OF HONOUR)을 수여했고 전쟁영웅담도 그만큼 화려하게 알려졌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도 같은 맥락에서 칭송됐다. 그러나 한국전은 결국 미군주력인 미 8군이 거의 괴멸되다 싶이한 참패를 맛봤고 남북분단선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어 영웅들의 칭송은 아무래도 빛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는 아직도 영웅들의 얘기만 있고 전쟁에서 죽어간 젊은 병사들에 관한 얘기는 없다. 그런 인식도 없다. 워싱턴의 참전용사기념비에는 미군 전사자 5만4천2백46명의 명단을 약력과 함께 컴퓨터에 입력해 언제든지 그 이름을 찾아볼수 있게 해 놓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어쩔수 없이 희생된 한국군 일등병, 이등병, 하사, 이등중사, 일등중사, 이등상사, 일등상사, 학생모를 쓴채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죽어간 학도명, 총알바지로 통하던 초임소위교들, 이들의 이름을 일일이 찾아내 그 이름을 불러 볼수 있는 기념관이 이 나라에는 없다. 많은 학교가 학도병 전사자를 냈지만 그들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학교는 없다. 아무리 경제건설이 어떻고 남북통일의 길이 어떻다고 해도 이 귀한 이름들을 찾아내지 않는한 한국은 격렬한 전쟁을 치른 나라로서의 위상은 세울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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