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삶 아프게 되씹듯 「무거움의 미학」 구축신예 여성작가 한강(25)씨가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간)을 냈다. 데뷔작 「붉은 닻」에서부터 희망없이 살아가는 이들의 절망과 우수를 섬세한 문체로 그려온 작가가 지난 2년간 발표한 7편의 중단편을 묶었다.
그의 소설은 이른바 「신세대」작가들이 일반적으로 다루는 소재나 주제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다. 재즈나 영화가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거나, 섹스를 매개로 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나, 이제는 진부해지기조차 한 외국여행의 체험은 그의 작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무조건반사처럼 쏟아붓는 감각적인 문체, 도발적인 단어구사, 현학의 과시 등도 그의 작법과는 동떨어져 있다.
대신 작가는 우울하게 지난 날을 살아온 인물들의 찢겨진 삶을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아프게 되씹듯이 써 낸다. 표제작 「여수의 사랑」의 정선과 자흔, 「질주」의 인규, 「야간열차」의 동걸, 「저녁빛」의 재헌, 「어둠의 사육제」의 명환들은 한결같이 결손 가정과 비참한 죽음을 과거사로 안고 광기로 발작하거나 허무한 복수의 장면을 연출하거나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아픔들은 대부분 희망적인 해결로 나아가지 못하고 상처를 안은 그대로, 또는 그보다 더 비극적인 방식으로 끝나버린다.
작가는 역사나 변혁이나 사회적 책임의 주제들을 90년대식 자유분방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탈색시킨다. 실존의 문제에 대한 천착, 그것을 풀어놓는 서정적인 방식등은 최근 발표된 다른 소설과 크게 대비되면서 「무거움의 미학」이랄 수 있는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 그 실존의 무게를 견고한 미학으로 끌어올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인의 일반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소통가능한 주제를 특유의 진지함을 갖고 다룰 때 무겁게 보이기에 그치고 말 수도 있을 그의 소설은 더 깊은 무게를 지닌 작품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중견작가 한승원씨의 딸이면서 올해 신춘문예로 등단한 오빠 국인씨와 함께 작가 가족을 이루고 있는 한씨는 93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김범수 기자>김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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