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풍」 불어도 민족잇는 다리로/63년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논의 첫물꼬/정권 필요따라 숱한 화해·단절… 「통일전령」 기대도스포츠는 이념과 인종, 국경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유고슬라비아 유혈 내전의 포연이 가득하던 92년 7월. 유고선수들의 대회 출전금지를 공식 결의한 「757 유엔안보리 결의문」에도 불구하고 세계스포츠 제전 바르셀로나올림픽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깃발 아래 세르비아와 보스니아계 여자탁구선수들이 복식 파트너로 출전했다. 스포츠만이 할 수 있는 인류 화합의 구현이었다. 그러나 이런 스포츠이념의 순수성은 남북한 위정자들에게 「정치 전략의 도구」로 오용되기도 했다. 남북한 정권은 국내정세 혼란의 도피처로 또는 국제정세변화에 따른 화해의 제스처로 필요때마다 체육교류라는 카드를 들고 나왔다. 상대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대화의 숨통을 틀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접근이 용이하고 파경의 충격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또 올림픽, 아시안게임등 각종 국제대회때마다 서로 적으로 대면해야 했던 비극적 현실에서 한민족에게 통일의 염원을 일깨워주는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해왔던 것도 체육교류가 간헐적으로나마 계속되어 온 이유이다. 그러나 분단의 비극을 안고있는 한반도에서 스포츠는 특히 정치적 「외풍」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체육교류는 항상 당시대의 남북관계 수위를 측정할 수 있는 가늠자 역할을 해왔다. 남북체육회담은 70년대 남북조절위원회, 국회·총리회담등으로 본격화한 정치회담보다도 10년 빠른 63년, 도쿄올림픽 단일팀 구성문제로 첫 대화의 창구를 열었고 이후 28년동안 27차례에 걸친 기나긴 노력 끝에 91년 2월 지바세계탁구선수권과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 단일팀 구성을 도출해냈다.
◇6·25이후 태동기의 체육교류
전후 「극한 대립과 긴장의 상태」에 있던 50∼60년대초 대화의 손짓을 먼저 내민 쪽은 북한이었다.
제59차 IOC총회에서 도쿄올림픽 남북 단일팀 권고안을 통과시키자 북측은 62년 7월 10월 11월 세차례에 걸쳐 단일팀 구성을 위한 북남조선올림픽위원회 대표회담을 촉구했고 63년 1월24일 IOC의 중재로 스위스 로잔에서 역사적인 첫 남북체육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서 남한은 김진규 대한체육회이사를 수석대표로 손기정 김정연 민용식 월터 정이, 북측은 김용황 북한올림픽부위원장을 단장으로 김기수 김화영등 고위인사들이 참석했다. 첫 회동서 양측은 △도쿄 올림픽단일팀구성 △선수선발은 동서독 선례에 따르고 △단가는 아리랑 △단기는 IOC 집행위원회에 일임한다는 4개항에 합의를 이뤘다. 그러나 이 4개항은 미묘한 양측의 견해차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다 28년뒤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구성의 기본틀이 됐다.
당시 북한은 66년 런던월드컵서 강호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오르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과시했으며 64년 인스부르크동계올림픽 여자빙상 3,000서 한필화가 은메달을 차지하는등 남측에 비해 경기력에서 우위에 있었다.
또 도쿄올림픽출전권을 놓고 인도 뉴델리에서 배구 아시아예선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남측은 남자부서 손영완의 활약으로 승리했으나 여자는 북한에 져 탈락하는등 각종 국제대회서 라이벌을 형성했다. 북한은 도쿄올림픽 도중 불만을 품고 선수단을 철수시켜 대회를 보이콧했다.
◇대결구도의 70년대 체육교류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은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에 머물러 있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1천만 이산가족의 가슴을 부풀게 한 이정표를 세운 일대 사건이었지만 불과 1년여만에 대화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은 73년 친중공계 중심으로 창설된 아시아탁구연합(ATTU)에 남한의 가입을 저지했고 남측이 출전한 국제대회에는 고의로 불참, 남한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후 6년여의 침묵 끝에 남북 접촉의 실마리를 푼 것은 79년 2월 남북 탁구회담이었다. 그해 4월 25일 열릴 제35회 평양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일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이 회의는 판문점서 4차례 진행됐는데 남북체육교류문제를 동시에 협의하자는 남측과 선 민족통일팀 구성을 내세운 북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결렬됐다.
북한은 72년 뮌헨올림픽서 이호준이 사격 소구경복사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22위(금1 은1 동3개)에 올라 33위에 그친 남한(은1개)을 앞섰으나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남4위,북5위)부터 우열이 뒤바뀌게 된다. 남한은 76년 몬트리올올림픽과 78년 방콕아시안게임(남3위 북4위)에서도 계속 우세를 잡았고 지금은 스포츠 세계10대강국으로 발전했다.
76년 5월6일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 준결승서 분단후 첫 축구 남북대결이 벌어졌는데 0―0 이던 후반 18분 북한 황상해가 남측 선수들이 주심의 부당한 판정에 항의하고 있는 사이 결승골을 넣는 해프닝으로 북한이 1―0으로 승리했다. 남측은 2년뒤 이대회 준결승서 재격돌, 승부차기 끝에 6―5로 신승해 1차전 패배를 설욕했다.
◇민족적 대제전 88서울올림픽
81년 독일 바덴바덴 IOC총회에서 한국체육사상 최대 제전인 88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됨에 따라 남한은 어느때 보다 적극적인 입장이 되었고 북한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84년 4월 정주영 KOC위원장 명의의 체육회담 제의로 5월까지 판문점에서 3차례 남북단일팀 구성문제를 다뤘으나 프라하에서 열린 공산국가 11개국 체육회담서 LA올림픽 보이콧이 결정됨에 따라 돌연 무산되고 말았다. 특히 당시는 83년 10월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만행과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 문제를 놓고 남측이 격렬히 항의, 양측 감정이 극도로 대립했다.
84년10월 사마란치 IOC위원장의 중재와 남측 노태우 KOC위원장의 제의로 85년 10월부터 87년 7월까지 로잔에서 4차례 열린 체육회담에서는 서울올림픽 분산개최문제를 다뤘다. 김종하 KOC위원장을 수석대표로 한 우리측 대표단은 「북측에 탁구 양궁 여자배구 전경기와 축구 예선 1개조, 기타 1종목을 양보한다」는 IOC 최종 중재안을 수용했다. 그러나 북측은 「탁구 축구 양궁 유도 레슬링 체조등 6개종목 개최」를 고집하다 88년 1월 「공동주최」를 주장하며 전격적으로 대회 보이콧을 선언, 민족대화합의 장에 동참을 끝내 외면했다.
올림픽 유치와 전두환 정부의 체육 육성 정책에 힘입어 남한은 84 LA올림픽서 10위, 86아시안게임 2위, 88서울올림픽 4위등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반면 북한은 대회 불참으로 경기력 저하와 국제 스포츠계에서의 고립이 심화됐다.
◇단일팀 결실과 북한체육의 고립
90년대초 동서독의 통일, 구소련과 동구권의 개혁·개방의 파고속에 북한도 고립의 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속에 미·일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89년말부터 90년초까지 9차에 걸친 남북체육회담에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던 양측은 90년 9월 베이징아시안게임 현장서 남북한 공동 응원단이 구성되는 것을 계기로 급속히 화해 무드가 조성됐다. 이사이 김우중 대한축구협회장과 당시 실세였던 박철언 의원이 북한 이종옥 부주석과 물밑 접촉을 통해 남북통일축구를 성사시켰다. 남북 동포의 뜨거운 하나됨의 몸짓이 양측 정부가 30여년간 못 허문 장벽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것이다. 10월11일, 23일 평양 5·1경기장과 서울 잠실올림픽경기장서 벌어진 2차례의 통일축구는 분단 이후 최고의 감동과 흥분을 안겨준 한마당 축제로 막을 내렸다. 평양전은 북한이 2―1, 서울전은 남한이 1―0으로 이겨 승부를 가리지못했다.
교류의 물꼬가 터지면서 91년 2월 남북한 대표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에서 「아리랑」 단가에, 흰바탕의 하늘색 한반도지도를 단기로 하는 역사적인 첫 「코리아」단일팀 구성에 합의, 남북체육회담은 30여년만에 첫 결실을 거둔다.
역사적인 코리아 단일팀은 일본땅 지바에서 여자단체전 9연패를 노리는 중국의 아성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우승의 주역 현정화, 이분희 선수와 코칭스태프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 6천만 동포는 그순간 가슴 뭉클한 환희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20여년간의 정치회담이 못이룬 민족적 한을 이 어린선수들이 「작은 통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감격은 청소년축구로 이어져 91년 6월 남북 선수들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평가전을 치렀다.
그러나 감동의 순간도 아랑곳없이 북한 핵문제가 양측의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급속히 냉각됐다.
하지만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오듯 「남북관계의 봄」을 이끌어 낼 전령은 스포츠가 될 것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송영웅 기자>송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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