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모든 삼라만상이 모시는 신성한 생명가치 잊을때 참사/삿갓공간속 세 젊은이 생환은 넉넉한 포용의 힘 증명「삼풍」이 서서히 잊혀져 간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속절없이 잊혀져간다.
이런 때 거친 옷 거친 자리, 곡기 끊고 엎드려 하늘에 죄를 청하던 옛 무구(허물을 없앰)의 예는 다만 헛된 의식에 불과했던가?
군왕만이 아니었다. 모든 선비와 비록 무학하나 하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농사꾼 백성들도 다 근신했다.
오늘 여든 야든 정치한다는 자 어느 하나 삼풍을 문제삼는 자 있는가? 하물며 제 탓이라 여겨 근신하는 자 있는가? 그들은 내내 아예 오불관. 눈에 불을 켜고 오로지 제 이익만 위해 동분서주한다. 도대체 정치란 무엇인가? 딱하다.서푼짜리 정치모리배 집단에 불과한 자들이다.
잊혀져간다.
아직도 시신을 못 찾은 유족들이 피눈물을 뿌리며 황량한 난지도와 서초구 염곡동을 헤매고 있는 지금, 사람들의 머리에서 언론지상에서 TV 화면에서 무정하게 속절없이 잊혀져간다.
다른 일이 아니다. 이제는 바로 제 목숨, 제 생명이 내일 아침 갑자기 아파트 대형붕괴로, 방사능과 오염된 물, 오염된 공기로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이 구조화된 생명의 위기 앞에 「잊음」이라니!
○구조화된 생명의 위기
삼풍이 어디 삼풍만의 일인가? 그것은 지난 30년근대화과정의 핵심인 중심가치관 문제를 압축한 사건이다. 경제가치 일변도의 물질지상주의에 의해 유린된 인간영성과 생명가치의 문제다. 온 세상 부귀영화를 다 얻는다 하더라도 제 생명을 잃고 나면 참으로 무슨 소용이 있단말인가?
그런데도 「잊음」. 바로 이것을 「잊음」.
당연히 잊었던 생명가치를 높이 들어 올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경제가치의 내용과 질과 방향을 서서히 생명가치쪽으로 접근변화시키는 「기우뚱한 균형」의 중도를 잡아야 할 때다. 그리하여 개혁의 내용과 정치전환의 기준을 제시해야 할 때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책임져야 할 지식인과 언론이 책임은커녕 인재니 관재니 떠벌려 문제를 축소시키고 어물쩡 넘어가며 「잊음」을 유도하고 있다.
「잊음」.
누군가 인류사를 존재망각의 역사라 했지만 세계 어디에도 우리 사회처럼 후안무치하고 미련스럽게 조직화된 존재망각의 땅은 없다. 도대체 이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병일까? 근대계몽주의자들의 입버릇처럼 또 민족성인가?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넋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나간 긴긴 일제의 암흑, 뒤이은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무자비한 독재와 5·18의 피바다, 그리고 끝없이 지속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애써 이 역사적 혼돈을 잊으려 외면하려, 그리하여 좁쌀만큼 작은 제 생물학적 삶이나마 지키려고 발버둥친 우리의 지난 날이 이 「잊음」을 체질화한 것같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초보적이나마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를 확보했고 절대적 빈궁을 훨씬 넘어 꽤 부유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음」은 더 고질화되어 치사한 불치병이 되었으니 무슨 까닭인가?
나는 삼풍에서 읽었다.
「너희는 나의 신성한 생명이 살 집을 다시 지으라」.
천명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인 「잊음」의 큰 틈이 고질화된 이 민족에 신성한 생명이 살 새 문명의 집을 지어 환난에 빠진 인류에 갈 곳을 제시하라는 이 천명은 과연 무슨 까닭인가?
참혹한 죽음의 지옥 속에서 난데없이 저 싱싱하고 침착한 환한 가을햇살처럼 앳되고 명랑한, 참으로 보석같은 세 젊은이가 서구의학의 통념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뭇 민초 시민들의 사심없는 환희와 감격 속에 생환한 사건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독일 녹색운동의 원조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20세기의 가장 걸출한 신비주의자다. 그는 인류역사의 대전환기에는 반드시 그 시대의 병적 혼란을 극복하는 새로운 문명시대의 비전, 새 원형을 제시하는 「성배의 민족」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 민족은 탁월한 집단적 영성을 지녔으되 끊임없는 천대와 고난 속에서 수없는 오류를 범해온 그러한 민족인데 현대에는 동아시아에 그 민족이 있다고 했다 한다. 그의 학교에서 공부하고 가르침을 전승한 일본 인지학회회장 다카하 이와오(고교암)선생은 그 민족이 바로 한국민족임을 한국사를 읽던 어느 날 무서운 전율과 함께 깨달았다고 내게 고백한 적이 있다.
잊음의 큰 틈에 새 생각의 샘물이, 죽음의 검은 깊음 속에서 꽃같은 새 생명이, 악이 창궐하는 수렁 속에서 신의 흰 미소가 떠오르는 대역설!
○가치전환은 생활속에서
희미하나마 이제 깨닫는다. 신령한 생명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새로운 젊은 생명력과 그들을 사심없이 구조하고 그 생환에 환호하는 민초들, 가난하나 양식있는 시민들이 참주체가 되어 먼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부터 그 전환을 시작하라는 것.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구체적인 삶의 태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모심」이다.
모든 인간, 모든 생명, 일체 삼라만상은 예외없이 제 안에 무궁하고 신령한 우주생명의 끝없는 창조적 진화생성을 모시고 있다.
「모심」은 바로 삶의 비밀이요 일체 존재의 비의다. 「모심」은 그 모신 바 우주생명의 질서에 따름이요 그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지극히 공경하여 그대로, 그러나 자주적으로 실현함. 「모심」을 자각적으로 실천하여 제 안의 영성적 우주생명의 자유의 만개를 실현함. 그리고 이웃과 뭇 생명 및 물질 속의 우주를 공경하여 거룩한 친교의 사회를 창조하고 자연을 근원적으로 회생시킴이다. 모시지 않는 존재는 없으며 존재한다 함은 곧 모심이다.
「잊음」은 바로 이 「모심을 잊음」이다. 그리하여 제 삶의 정체성을 잃고 아무데로나 충동대로 시세대로 흐르며 이웃관계를 욕망과 경쟁관계로 적대화시키며 무차별개발로 자연을 파괴하여 결국 우주로서의 제 삶을 부수고 죽인다. 「잊음」이 곧 삼풍의 주범이다.
모심, 자각적 모심은 그 모신 바 신령무궁한 우주생명의 그 실체가 아닌, 그 생성을 님으로 불러 모시되 동시에 그 생성에 친구처럼 수평적으로, 그리고 자주적으로 동역하는 파트너가 됨이다.
○틈을 열어주는 뒷바라지
오늘 아침 TV에서 최명석군의 아버지 최봉렬씨의 가족이야기를 들었다. 흔히 누워 잠자는 애비의 배를 타고 아이들이 마구 뛰놀았다 한다. 때리기는커녕 엄격하게 하지도 않았으며 늘 아이들 스스로 자주적으로 크도록 말없이 뒷바라지만 했다 한다.
기껏해야 「만근이 못되면 천근, 천근이 못되면 백근이라도 되라」고 신중하기를 당부한 정도. 부자지간이 서로 눈이 마주치면 말없이 그저 싱긋 웃을뿐. 그러나 그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한없이 귀한 존재로 높여 모시되 동시에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온 것 뿐이라 한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해맑고 잔잔하고 자주적이면서 끈질긴 저 신령한 생명력! 멋진 젊은이 아닌가!
결코 요즈음 자칭 도덕지도자들이 강변하는 구닥다리 효도의 결과가 아니다. 딱히 효도라 부를 작정이라면 그것은 부자지간의 쌍무적 효도일 것이다.
그것은 부부지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신령무궁한 우주생성으로 인정하고 님이라 불러 모시되 오히려 그로 인해 참다운 수평적 우정을 창조하는 부부의 새 윤리다.
애인, 친구, 이웃과 사제지간, 노사지간, 상하지간, 주객지간 및 다른 민족, 모든 생명과 일체 삼라만상, 기계나 도구와 구조물, 보이지 않는 문화, 생각, 정서까지도 그 신령한 생성을 님으로 불러 친구로서 모시고 그 생성에 동역함.
그리하여 자신과 상대 안에 생성하는 그만의 개성적인 우주생명을 그 결대로 한껏 살려 자기를 성취하며 따뜻한 충고와 조심스런 개입으로 속벌거지를 잡아주고 그 차원을 변화시키며 촘촘빽빽하면 솎아내 틈을 넓혀 자유로운 창조적 여백을 열어주는 것. 마치 벼농사와 같이.
그렇다. 이것이 우주 생명주체의 자기성취와 새세대의 사랑, 예절, 교육, 윤리와 문화 일반, 그리고 노동의 새 원리다.
모심은 틈을 전제한다. 거리를 두어 공경하는 우정. 수평이 아닌 관계는 모두 다 억압이지만 거리를 두지 않고 높이지 않는 밀착적 사랑은 음란과 증오와 근친상간과 공모에 이르는 단순육욕의 길이다.
이 틈은 세 젊은이가 살아나온 그 삿갓공간, 그 생명공간의 신비이자, 그 속에서 상황을 존중하되 두려워하지 않고 제 안의 생명흐름에 동역하되 무심한 여유를 가졌던 그들 마음의 비밀이다. 그것은 그들 부모가 요즈음의 저 숱한 부모들의 입버릇, 「너를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다」하며 마구 비벼대는 요설과 지나친 간섭과 염치없는 억압이 없는, 틈을 열어주는 따뜻한 침묵의 결과이며 어쩌다 한두 마디 삶의 지혜로 그들 마음의 흐름을 스스로 바로잡게 한 탓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귀중한 생환의 비밀, 생명의 비밀은 「잊지 않음」에 있다. 유지환양이 그 어머니의 고단하지만 성실한 삶, 무자각적이긴 하나 바로 자기 안의 신령한 우주생명질서를 지극히 모신 삶과 함께 그 삶의 지혜의 열매인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한 마디를 고이 모셔 「잊지 않음」에 있다.
○불망이 자각적 실천조건
이 「불망」이 「모심」의 자각적 실천의 조건이다. 이 민족이 삼풍을 잊지 않고 그 깊은 뜻을 모셔 마치 한식처럼 영세불망하는 것.
이것이 「죽임」에서 「살림」으로 나가는 길목이요 개혁과 전환의 조건, 새 문명의 집을 짓는 민초들의 새 삶의 첫 번째 초석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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