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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폴리오(가요30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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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윈 폴리오(가요30년:4)

입력
1995.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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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기타 혁명」 일으킨 70년대 신세대/「하얀 손수건」등 대학가 휩쓸어/번역곡·사랑노래에 머문 한계도요즘 청소년 사이에 컴퓨터를 모르면 바보 취급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70년대 신세대에게 있어 통기타는 교양필수 과목이었다. 이제 장년이 되어 있는 그들은 아직도 「사랑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등 쉬운 코드로 이루어진 곡들을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단순히 따라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주까지 제 손으로 해낸다』 음악을 즐기는 방법의 혁명을 가져온 것은 바로 「포크음악」으로 국내에 포크 음악의 물결을 일으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남성 듀엣 「트윈 폴리오」이다.

<헤어지자 보내 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올라 서서…> (하얀 손수건)

「하얀 손수건」을 비롯해 「웨딩 케이크」 「축제의 노래」등 송창식과 윤형주의 화음이 어우러진 연가는 당시 대학가 다방에서부터 해변 캠프 파이어까지 분위기를 주도했다.

67년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활약하던 「세시봉 트리오」가 「트윈 폴리오」의 전신이다. 68년 초 멤버였던 이익근이 입대한 후 남은 두사람은 그곳 주인의 아들이었던 이선권씨(현 실업인), 대학생 DJ 이상벽씨(현 방송인) 등의 권유와 후원으로 「트윈 폴리오」를 조직, 68년 음반을 만들었다.

연세대 의대 2년생으로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윤형주는 집안의 반대에 거의 잠적하다시피 하면서 연습과 녹음을 했다. 『세시봉에서 노래를 부를 때 팬을 자처했던 김영남선생님(당시 학원강사·현 교육방송 기초영어 강사)이 많은 도움을 줬지요. 송창식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자 원효로에 있는 자기 집을 비워줘 우리는 그곳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연습을 했습니다』 윤형주의 회상이다.

그러나 존 바에즈로 대표되는 미국의 포크음악이 반전의 메시지를 토해내는등 사회운동 매체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 「트윈 폴리오」에 의해 한국에서 시도된 포크음악은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번역곡 위주, 사랑노래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한계가 이후 김민기 양희은 등 후배들에 의해 치열하게 극복되기는 했지만….

69년 12월 윤형주의 학업을 이유로 「트윈 폴리오」는 채 2년을 못채우고 해체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길이지만 송창식과 윤형주라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두 기둥으로 거듭난다.<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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