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지자제선거때 나는 평생 처음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해보았다. 북한에 있을 때 명색이 선출직인 도 인민회의 대의원(우리의 도의원격)을 세 차례나 했기 때문에 투표를 하는 감회가 남달랐다. 투표하면서 북한에서의 인민회의 대의원생활을 회상해 보았다.유세장에서 후보자들이 자신을 뽑아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을 보고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 나는 한번도 나를 뽑아달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1백% 가까운 투표에 1백%에 육박하는 찬성이니까 선거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당국의 시나리오에 따라 대의원이 됐으니까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인지상정상 주민들의 기대감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래도 자신들의 대표라고 나를 찾아와 여러가지 하소연을 했다. 대부분이 일상생활에 대한 호소였다. 가장 많은 것은 배고파 못살겠으니 중앙에 얘기해 줄어든 식량배급을 정상화해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가정부인은 사회주의는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데 노동당 간부와 보위부 간부들이 특별히 잘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지기도 했다.
사회안전원들의 전횡에 분격해 이를 바로잡아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더러는 국가에서 시키는대로 외화벌이를 했는데 왜 응분의 대가가 없느냐는 항의도 있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나라 사정이 어려우니 참고 견디면 좋은 세상이 온다』는게 고작이었다. 입가에 쓴웃음을 짓거나 눈을 아래로 내리 감은채 돌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인민회의때마다 김일성의 교시가 내려오고 주민생활 향상을 위한 결의가 채택된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북한에 있을 때 나는 『가난은 하늘도 못말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한에 와서 생각하니 북한의 가난은 하늘도 못말리는게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주민들중에는 가정불화로 인한 부부간 다툼을 중재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가정을 방문해보면 시집살이에 지쳐버린 며느리와 시부모간의 갈등이 대부분이었고, 근본원인은 먹을게 부족한데 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심지어는 남편에게 밥을 조금만 먹으라고 했다가 이혼한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서로가 참고 잘살라』는 하나마나한 소리가 전부였다. 배고파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대의원들은 지방예산에 대한 결산과 비준을 위한 회의에 참가하고 준법정신을 위한 지시등을 하달한다. 북한주민들은 법을 어기고싶어도 어길 여력이 없는데도 준법지시는 자꾸만 하달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서울생활 1년만에 새삼 느끼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식이 물질을 선행한다」는게 과연 맞는 말이냐 하는 점이다. 나는 절대로 의식이 물질을 선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속담에 『3일만 굶으면 담장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지금 북한주민들은 3일이상을 굶은 상태이다.
북한주민들이 남한과 같은 생활수준에 가면 그들도 선량한 국민이 될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은 하루빨리 절대빈곤을 해결해야만 한다.
절대빈곤을 해결하지못한 북한에 상식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약력
정기해
▲43년 일본 후쿠시마(복도) 출생(52세) ▲이바라기(자성)현 미도(삼호)시 조선인중고급학교 졸업 ▲60년 가족과 함께 북송 ▲평안북도 구성시 기계전문대 졸업 ▲평안북도 정주트랙터 공장장 ▲평안북도 인민회의 대의원 3선(88∼93) ▲94년 중국을 통해 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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