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조리한 현실과 무조리한 연극평온해 보이는 어느 도시의 아침, 장을 보러 오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서서히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물든다. 곧 이어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급기야 광장이 주검으로 가득 차게 되는 장면으로 이오네스코의 「살인놀이」는 시작된다. 이후 16장의 장면들에서 이오네스코는 죽음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와 에피소드들을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죽음과 과학, 죽음과 종교, 죽음과 정치, 죽음에 대한 공포, 절망과 비극, 인간의 이기심과 추악함과 폭력, 죽음에 대한 사유. 각 장면들을 일관성있게 꿰뚫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수도사복장의 인물과 이오네스코의 관조적인 눈길이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과 사회적 배경이 없다면 「살인놀이」는 단편적인 상념들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모음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처럼 극장 밖의 현실이 무대위의 세계를 실감나게 하는 상황이 또 있을까?
안정과 풍요의 상징인 백화점의 붕괴로 죽음의 냄새가 사방에서 피어 오르고 죽음의 소문이 만연한 이때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이 돌연 조리있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허나 현실이 이렇게 극의 얼개를 탄탄히 받쳐줌에도 극단 완자무늬의 공연은 응집력이 없이 산만하고 표피적이다. 사건이 직선적으로 발전하기보다 병렬식으로 제시되는 구조일수록 희곡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치밀한 계산이 요구되는데 연출가 김태수는 이오네스코를 정리하지 못한 듯하다. 일관성없는 공연스타일, 젊기만 한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 진부한 음악의 남발은 극이 진행될수록 죽음의 그로테스크함을 긴장감있게 구축하기보다는 오히려 풀어헤쳐 흐트러뜨린다.
부조리극은 인간사와 존재의 허무함을 비논리적이며 비전통적인 형식에 담아내는 것이지 무조리하게 뒤죽박죽 공연해도 좋다는 면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이 미진함을 어찌 작가와 연출의 탓만으로 돌리랴? 「어딘가/어느 때」로 설정해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려는 극중세계가 「지금/여기」의 현실로 다급하게 다가올 때의 당혹감, 그리고 극적 상상력이 현실의 드라마를 따라갈 수 없을 때의 좌절과 무기력함이 일어나는 까닭은 현실의 사건이 통찰은커녕 모방도 제대로 못할 만큼 상상을 초월해 터져나오고 「우하하」 달아나 버리는 탓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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