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평민당·91년엔 신민당 창당 주도김대중이사장은 18일의 신당창당 선언으로 40여년의 정치역정에서 모두 10개의 당에 몸을 담게 됐다. 그의 이력서에 수많은 당명이 기록되게된 이유는 유달리 부침이 잦았던 한국 정당사에 기인한다. 그러나 87년의 평민당, 91년의 신민당, 그리고 이번 경우는 전적으로 김이사장이 주도한 것이다.
지난 54년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한 김이사장은 강원 인제에서 4, 5대에 잇따라 민주당으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뒤 61년 5대보궐선거에서 민주당공천으로 당선됐으나 사흘만에 5·16쿠데타가 발생해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63년 새로 재건된 민주당에서 대변인을 맡아 6대총선에서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됐다. 이어 야당 통합에 따라 자동적으로 민중당(65년) 신민당(67년)으로 당적을 바꾸었다. 67년 7대총선에서 신민당으로 당선된 그는 8대총선에서는 전국구로 진출했다.
72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그는 박정희후보에게 95만표차이로 패배했다. 그뒤 73년의 납치사건등 정치적 고행의 길을 걷던 그는 79년 10·26사건이후 복권됐으나 신민당 입당을 보류하다 80년 5·17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에 의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82년말 타의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간후 국내의 김영삼씨와 함께 84년 민추협을 결성했던 그는 85년 2월 귀국, 2·12총선에서 신한민주당(신민당) 돌풍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이어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 자격으로 87년 김영삼씨와 함께 이민우총재의 신민당을 깨고나와 통일민주당(민주당) 창당, 상임고문직을 맡았다. 87년 자파세력을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나와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고 그해 12월 대선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그는 91년 일부 재야세력을 흡수,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을 새로 창당한 뒤 이기택대표의 「꼬마」민주당과 통합해 새로운 민주당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았다.
92년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그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 뒤 94년 1월 아태재단을 만들어 이사장직을 맡아 오늘에 이르렀다.<김광덕 기자>김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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