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베이징에서는 북한에 쌀을 제공하기 위한 남북한 당국간의 협의가 진행중이다.그런데 우리 국민들 가운데는 북한에 무조건 쌀을 주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북한이 남한에 대해 계속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데 쌀을 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지만 왜 쌀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것같다.
최근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제기한 질문들을 보아도 북한에 쌀을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 아직 공통된 인식보다는 혼란과 의문이 더 많은 것같다. 국회의원들은 대부분 쌀제공의 목적보다는 그 방법과 조건을 문제삼았지만 이것은 목적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측이 처음부터 목적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순수한 동포애」라는 수사적인 표현은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얼마나 의미있게 받아 들이는지는 의심스럽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것만은 사실인 것같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이 한국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한국쌀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 극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국쌀의 생산지를 표시하지 않고 운반선박의 태극기도 내리도록 요구한 것은 그들이 그만큼 위험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만일 북한이 한국쌀을 지원받았다는 사실이 북한주민들에게 알려지면 그 정치적 파장은 매우 심각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두 개의 전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 전략은 「압력을 통한 변화」전략이다. 북한뿐만 아니라 무릇 인간은 피할 수 없는 변화의 필요성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과거의 타성을 버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변화하지 않으면 자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북한을 몰아 넣는 전략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북한체제가 손을 들 때까지 계속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마침 북한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고 에너지, 식량등이 부족한 만큼, 한국입장에서는 북한이 변화를 받아 들일 때까지 북한경제에 더욱 압력을 가하는 전략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 경우 쌀을 무상제공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압력」전략은 논리적으로 단순명쾌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정서에도 잘 맞는 면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압력」전략이 효과적이려면 북한을 국제적으로 완전고립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중국, 일본, 미국등이 손쉽게 우리의 「압력」전략에 동조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북한체제는 고립과 압력, 그리고 빈곤 속에서도 붕괴되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쿠바나 이라크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경우에 「압력」전략은 한반도의 긴장만 고조시키고 문제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셋째로 북한에 살고 있는 우리 겨레의 삶이 지금보다도 더 처참한 지경으로 될 수 있다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대북전략은 민족의 통일을 지향해야 하지만 북한동포들의 인간적 운명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압력」전략이 어렵다면 접촉을 통한 변화를 모색하는 전략을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이홍구 총리가 국회답변에서 「접촉을 통한 변화」를 언급했으므로 우리 정부는 사실상 「접촉」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접촉을 통한 변화」전략의 가장 어려운 점은 과연 접촉하면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실 접촉이 변화를 유발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동유럽의 변화에서 보듯이 인류역사를 통해 모든 사회는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역으로 북한은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변화없는 체제고수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사회와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정부는 일단 이와 같은 전략개념을 정립한 후에는 지나치게 여론에 신경을 쓰지 말고 전술적 차원에서는 상당한 신축성을 가지고 전략목표는 일관성있게 추구해 나가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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