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은 세계최초로 핵무기가 개발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은 45년 7월 16일 핵실험에 성공, 원자폭탄으로 2차대전을 조기 종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뒤이어 인류는 내내 핵공포속에 살아 왔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을 통해 50년간 인류의 대참사를 막아온 핵무기의 개발은 이제 비등하는 반핵 여론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프랑스의 핵실험 재개결정으로 다시 촉발된 거센 반핵여론이 현재 추진되고 있는 전면 핵실험금지조약(CTBT)체결에 이어 궁극적으로 핵무기의 완전폐기를 이끌어낼 지 주목된다.<편집자주> ◎핵확산·실험금지 2개조약의 앞날/각국 이해대립… 감축 “산넘어 산”/비보유국들 개발욕구 억제 불구/미·러·중·불등 보유국 경쟁여전 편집자주>
지구상의 핵무기는 없어질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쯤일까.
50년전 처음 등장해 실제로 사용된 후 핵무기는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양적· 질적으로 팽창만을 거듭해 왔다. 지난 5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세계적 논란을 거친끝에 무기한 연장의 합의에 도달했지만 핵의 장래는 결코 밝다고 할수 없는 실정이다.
NPT는 핵비보유국들의 핵보유를 통제하는 영구적인 장치로 새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핵보유국들이 약속한 핵무기감축 노력은 합의당시와는 딴판으로 흘러갈 소지가 다분한게 작금의 현실이다. 비보유국들이 조약의 무기한연장에 합의한것은 핵보유 5개국의 핵독점을 인정하되 궁극적으로 이들이 보유한 핵무기가 철폐돼야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며칠뒤 조약 서명의 잉크도 마르기 전인 5월15일 중국은 42번째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뒤이어 프랑스의 시라크정부 역시 핵실험강행을 결정했다. 이때문에 핵보유국들의 핵감축약속이 감언이설일뿐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두나라는 이미 96년까지 실시할 핵실험의 계획을 밝혀놓고 있다.
NPT가 새로 연장되자 마자 이처럼 핵실험이 잇따르는 것은 핵보유국들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기 때문이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등 5대 핵강국은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 체결을 내년말까지 매듭지어야 한다. 조약이 체결될 경우 핵보유국들은 핵실험을 금지해야한다는게 조약의 근본취지이다. 그러나 여기서 핵보유국들은 다시 핵부국과 핵빈국으로 처지가 갈리기때문에 이 입장차이가 내년말까지 좁혀져 조약체결이 성사되기는 쉽지 않게 돼있다.
미국은 러시아와 함께 지난 92년 9월부터 이 조약과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핵실험 중단을 선언해 놓고 있는 상태이다. 영국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얼핏보면 중국과 프랑스가 핵평화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과 러시아는 그동안 핵선발국의 지위를 누려오면서 이제 핵실험을 덜해도 기존의 핵무기를 유지해 나갈 만한 기술과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안해도 되니까 하지말자는 입장을 내세울 수 있는 데 비해 중국이나 프랑스는 판이한 처지인 것이다.
핵보유국들이 핵실험을 계속하는 것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제대로 성능을 발휘하는지, 혹은 개량할 부분이 무엇인지등을 확인, 이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실험을 통해 새로운 데이터를 계속 보강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중인 CTBT협상에서 각국이 제시하는 핵실험의 허용범위를 보면 각국의 핵기술 수준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우선 미국이 제시하는 핵실험 허용규모는 TNT 4파운드 규모이다. 이에 비해 러시아는 10톤이고 프랑스는 1백톤까지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아예 『「평화적」핵폭발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형편이다. 미국은 특히 컴퓨터 시뮬레이션 기술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실제로 핵폭발을 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정보를 비축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제네바 군축회의에서 진행중인 CTBT 협상에서는 조약이행의 강제적 장치 확보및 검증체계, 조약의 기한등도 실험범위와 함께 중요한 쟁점들로 꼽히고 있다.<뉴욕=조재용 특파원>뉴욕=조재용>
◎무루로아섬 불핵실험 방법/지하천m 시추… 갱도막고 폭발/광케이블로 지상연결 각종정보 전달
프랑스가 과학적 근거를 내세워 「안전」을 주장하며 강행하는 남태평양 무루로아섬의 핵실험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오는 9월부터 8차례 실시될 핵실험은 지하 1천지점에서 진행된다. 콘크리트와 석고, 장갑용 철판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핵폭탄이 터지는 순간 지상과 연결된 광케이블을 통해 수백만가지 정보가 지상관제소로 전달된다. 폭발시간은 수백만분의 1초에 불과하지만 준비작업에는 약 6주일이 소요된다.
준비작업은 크게 3단계로 나눠진다. 1단계는 무루로아섬 정상의 초호중 한 지점을 선정해 지하 수직갱을 파는 작업. 바다에서 석유를 시추하는 기술을 그대로 원용해 직경 1·5∼2의 구멍을 뚫는다. 무루로아섬의 평균 표고는 3, 가장 높은 지점이래야 해수면에서 높이 7에 불과하지만 수면 아래에는 해저 1백30에 이르는 거대한 수중화산이 있어 핵실험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직갱 시추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프랑스 본국으로부터 핵폭탄, 기폭장치, 관제 시스템, 계측장치등 관련 장비들이 속속 도착한다. 수직갱이 완성되면 2단계 작업에 들어가 각종 장비들이 조립 완성되고 핵폭탄은 길이 20가량의 밀폐된 특수용기에 담겨진 채 갱도의 가장 밑부분에 놓여진다. 3단계는 갱도를 막는 작업으로 암석 콘크리트 석고등을 번갈아 쏟아부어 갱도를 철벽같이 막는다.
드디어 D데이. 관제소에서 버튼을 누르면 가벼운 진동이 느껴진다. 이때 과학자들은 광케이블을 통해 전달되는 수백만가지의 정보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다. 수시간후 이들이 폭발지역의 해저 용암과 가스등을 채집함으로써 핵실험은 끝난다.<파리=송태권 특파원>파리=송태권>
◎최초 원폭개발 「맨해튼 프로젝트」란/루스벨트 지시로 1942년 수립/45년 뉴멕시코 공군기지서 첫실험
지금부터 꼭 50년전인 「1945년 7월16일 상오 5시30분」, 미국의 뉴멕시코주 앨러머고 공군기지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버섯구름이 지상 2천2백까지 솟구쳤다.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탄생하는 순간이자 미행정부가 2백억달러를 투입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신호였다.
미국이 인류에게 핵공포를 안겨준 최초의 핵폭탄 개발에 착수한 것은 지난 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미대통령은 현대 물리학의 대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핵폭탄의 제조가능성을 확인한 뒤 즉각 핵개발 지시를 내린 것이다.
루스벨트대통령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6천만달러를 투입, 연구개발위원회를 설치한데 이어 1941년부터는 모든 핵개발작업을 미과학연구개발국에 맡겼다.
미행정부는 1942년 6월 육군의 지휘아래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을 제조하기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중이던 미국은 비슷한 시기, 적국 독일도 원자폭탄을 개발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영국과 캐나다로부터도 과학자들을 데려왔다.독일보다 핵개발이 늦을 경우 초래될 무서운 결과에 대한 위기의식때문이었다.
또다시 1백억달러를 더 쏟아부은 미국은 1942년 12월 시카고대학 연구팀이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핵분열물질 플루토늄―239의 추출에 성공했으며 이듬해에는 핵기폭장치를 만들어냈다. 드디어 1945년 여름, 미국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핸드퍼연구소는 연쇄 핵폭발을 일으킬 수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플루토늄―239를 확보했으며 원자폭탄 2개가 제조됐다.
이 원자폭탄들은 즉각 실험장소로 옮겨져 7월16일 무서운 위력이 확인됐고 8월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결국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밑거름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론 인류에게 핵공포를 심어준 「불행의 씨앗」이었다.<이상원 기자>이상원>
□핵개발 일지
△45년 7월 16일=미국, 세계최초 원폭실험 성공
△ 〃 8월=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49년 8월=소련, 원폭실험 성공
△52년 10월=영국, 원폭실험 성공
△57년 10월=국제원자력기구(IAEA) 출범
△60년 2월=프랑스, 원폭실험 성공
△63년 8월=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PTBT) 조인
△64년 10월=중국, 원폭실험 성공
△68년 7월=핵확산금지조약(NPT) 조인
△70년 3월=NPT 발효
△72년 5월=미·소, 전략핵무기제한협정(SALT 1) 조인
△74년 5월=인도, 지하핵실험 성공
△ 〃 7월=미·소, 지하핵실험제한협정 체결
△75년 4월=한국, NPT 가입
△79년 6월=미·소, SALT 2 조인
△ 〃 12월=북한, NPT 가입
△91년 7월=미·소,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1) 조인
△93년 3월=북한, NPT 탈퇴선언
△ 〃 8월=전면핵실험금지조약(CTBT) 체결 임시특위설치
△94년 10월=북·미, 핵합의 타결
△95년 4월=NPT 무기한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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