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14대대선 전략차원 「꼬마민주당」 통합/은퇴후 KT 대표당선 지원등 한동안 「밀월」/재단창설이후 갈등내연… 「경기지사」 결정적김대중아태재단이사장과 이기택민주당총재가 결별의식만 남겨두고 있다. 지난 91년 8월 신민·민주합당으로 두사람의 「동거」가 시작된지 3년10개월만의 일이다.
두사람의 동거는 김이사장의 14대 대선전략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이사장은 92년 총선과 대선승리를 위해 고질적 「지역당」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부산출신인 이총재와 비호남권의 홍사덕 이철 노무현 의원등 「청문회스타」들이 포진한 「꼬마 민주당」과의 통합필요성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김이사장이 소속의원이 8명에 불과한 민주당측에 통합당 지분의 40%를 서슴없이 할애한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당시는 이총재 역시 91년 지방의회선거의 참패로 자생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을 때였다.
통합후 민주당은 14대총선에서 97석을 확보, 제1당의 위치를 확실히 지켰다. 그러나 의원들의 지역분포는 여전히 호남과 수도권에 집중돼 두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DJ당」에 이총재가 얹혀있는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됐다.
김이사장이 대선패배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난 뒤 열린 93년 3월의 전당대회에서 이총재는 김이사장의 후원을 업고 당대표에 당선됐다.
김이사장은 영국체류중에도 측근들을 통해 이총재 지지의사를 반공개적으로 표명, 이총재가 비주류의 김상현 정대철 후보의 도전을 뿌리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사람은 「밀월관계」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김이사장이 영국에서 귀국, 아태재단을 창설해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름의 대권구상을 갖고있는 이총재는 내심 김이사장의 행보를 정계복귀의도로 의심하며 경계심을 늦추지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배태된 두사람간의 갈등은 지난해 12·12투쟁과정에서 표면화했다. 강경일변도의 장외공세를 벌이던 이총재에게 김이사장이 언론인터뷰를 통해 『원내에서 싸우는것이 좋겠다』고 전략수정을 권유하자 이총재는 이를 『당원 한사람의 얘기』라며 일축했다. 이어 1월의 조기 전당대회파동에서는 이총재가 김이사장을 「민주당의 실질적 오너」, 자신을 「고용사장」에 비유하는가 하면 김이사장에게 공개담판을 요구하기도 했다. 세대교체를 주장하는 「태양론」과 총재직사퇴및 탈당발표 해프닝이 일어난 것도 이때였다.
무엇보다 두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 것은 경기지사 후보 문제였다. 김이사장은 이종찬 의원을 밀었으나 이총재는 장경우 전의원을 고집, 결국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 과정에서 후보경선현장의 폭력사태가 발생했고 이총재는 또다시 총재사퇴카드를 빼들었다. 이에 김이사장도 『40년 정치하는 동안 저런 사람은 처음 본다』며 정면대응했다.
또 6·27지방선거중 이총재는 김이사장이 등권론을 들고나오자 세대교체로 맞서는등 사사건건 반대편에 섰다. 선거후 김이사장은 『도저히 이총재와는 당을 함께 할 수 없다』며 신당창당을 결심했다. 이러한 갈등과 결별의 이면에는 결국 97년 15대 대선을 둘러싼 상충된 구상이 깔려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두사람 대권때문에 만나 또 이 때문에 갈라서는 기구한 악연을 맺은 셈이다.<유성식 기자>유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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