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4월 병석의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양곤에 갔을때 아웅산 수지는 42살의 한 지식인 여성에 불과했다. 미얀마의 전설적 독립영웅 아웅산장군의 딸로 한살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미얀마의 양곤대학,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 경제학등을 공부한 후 영국인 대학교수 마이클 아리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옥스퍼드에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온 고국에서 그는 역사의 부름을 외면하지 못했다.그 당시 미얀마는 30여년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중시위가 한창이었고, 군의 발포로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사람들이 죽어서는 안된다. 나의 아버지는 국민을 죽이라고 군을 창설하지 않았다』고 호소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가 시위현장에서 「비폭력과 용서」를 외치며 연설할 때, 아웅산장군의 연설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한덩어리가 되어 눈물을 흘렸다.
아웅산 수지는 분열된 민주화세력을 한데 묶어 민족민주동맹을 조직, 연금상태에서 치른 1990년 5월 선거에서 70%가 넘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군부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그를 계속 자택에 억류했다. 그는 89년 7월부터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집에 갇혀 있었고, 미얀마 군부는 지난 10일 마침내 연금을 풀었다.
그는 1년남짓 거리에서 싸운 민주화 운동과 6년의 연금생활을 통해 반독재 투쟁의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한평생 독재와 맞서 싸워온 그 어떤 인물보다도 그는 유명해졌고, 존경을 받았다. 그는 91년에 노벨 평화상을, 92년에는 국제인권법률단체의 인권상과 유네스코상을 받았고, 95년에는 인도정부가 주는 네루상을 받았다. 아웅산 수지를 석방하라는 세계의 여론이 빗발치자 미얀마 군부는 『정치활동을 포기하면 가족이 있는 영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는 『국민과 동지들을 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고 번번이 거절하며 민주화를 요구해왔다. 그가 연금생활중 가족을 만난 것은 단 한차례였다.
그는 6년간 집에 갇혀있으면서 세계를 움직였다. 키 1백55㎝의 그 가냘픈 여성은 절대적으로 고립된 채 일관된 비폭력과 불굴의 용기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그는 초기에 정치적 야심이 없어 상징적 존재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으나, 그 비정치성이 어떤 회유에도 원칙을 바꾸지 않는 강인함이 되었다. 세계의 수많은 인권운동가, 반독재투쟁가들 중에서 단 7년의 투쟁으로 우뚝 선 아웅산 수지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의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한번 생각해볼만한 과제다.<편집위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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