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시간 사투… 콘크리트 틈새 “발가락이 보인다”/“조금만 참아라” 숨죽인 구조/TV 지켜보며 전국이 조마조마/사신 물리친 용기에 뜨거운 박수『발가락이 보인다』 최명석(20)군의 인간승리에 환호했던 국민들은 11일 다시 눈과 귀를 의심했다.
TV화면에 생생히 잡힌 유지환(18)양의 발가락은 육중한 콘크리트 더미의 작은 틈새 속에서 빼꼼히 빠져나왔다. 빨간 페디큐어가 선명한 작은 발가락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조금씩 움직였다. 『와. 또 살았다』기적은 이틀만에 폐허의 현장에 또다시 찾아왔다.
18세. 1백58㎝. 긴 생머리의 10대 소녀 지환양. 삼풍백화점 지하1층 가정용품부에서 도자기를 팔던 지환양은 매몰 2백85시간 만에 찾아온 광명의 감격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들것에 실려나가면서 얼굴에 가린 노란 수건을 손으로 잠시 떼어냈다가 다시 덮은 지환양은 앳된 소녀티를 막 벗어난 모습이었다.
지환양의 건강한 생환을 숨죽이며 지켜본 국민들은 힘찬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어둠과 고독, 두려움의 지하연옥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물리치고 광명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맑고 귀여운 10대 소녀의 생환은 감격에 앞서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지난 9일 최군의 2백30시간 생환에 힘입어 구조작업 방식을 시신발굴위주에서 생존자구조로 바꾼 합동구조반은 11일 이틀이 지나도 시신만 40여구 이상 발굴한 채 더이상의 생존자를 찾지 못하자 낙담했다.
하오1시45분 구조대원 정상원(30·영등포소방서 119구조대)씨는 포클레인의 움직임을 별 생각없이 따라가고 있었다. 콘크리트와 철근더미 속에 만들어진 주먹만한 구멍 속에서 무엇인가가 잠깐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실종자들의 물건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망막에 남아있는 잔영, 그것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생명체의 미동 같은 것이었다.
모든 작업이 일순 중단됐다. 확인이 시작됐다. 조심스레 콘크리트와 철근을 하나씩 들어냈다. 그러나 다시 흙이 구멍을 메웠다. 손으로 구멍을 파헤쳤다. 『발가락이다』 구조대원들은 동시에 외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어 발목이 드러났다.
『살아있으면 발가락을 움직여 보세요』구조대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발가락은 천천히 움직이며 화답했다. 『이름은, 나이는』흥분한 구조대원의 질문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박또박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저씨, 나 여기 며칠간 있었어요』 지환양은 구조의 기쁨보다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매몰돼 있었는지가 궁금한 듯 자꾸 물어왔다. 매몰 13일째, 2백85시간, 기적은 또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보여준 10대후반의 소녀는 전국민의 흥분과 감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커피가 마시고 싶어요』라고 천진스럽게 말했다.<고재학 기자>고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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