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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압력·경제악화에 굴복/미얀마,수지 여사 연금해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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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압력·경제악화에 굴복/미얀마,수지 여사 연금해제 배경

입력
1995.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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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보수파의원들 제재강화 목소리 높여/고립무원 군정 “정권붕괴 막자” 고육책미얀마(구 버마) 민주화의 화신인 아웅산 수지(50)여사가 10일 근 6년만에 가택연금에서 해제 됐다. 독립운동의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자 두자녀의 어머니인 수지여사는 가녀린 여성임에도 불구, 아시아에서 마지막 남은 군사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조국의 민주화 회복에 앞장서온 인물이다.

그의 비폭력 비타협투쟁은 91년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줬지만 사실 그가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게 된 건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88년 5월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당시 절정에 이른 민주화시위와 당국의 시위탄압을 목격하고는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15세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옥스포드대학 재학시절 티베트 연구가인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를 만나 두자녀의 평범한 어머니로 살아왔다. 그러나 미얀마 독립영웅인 아웅산장군의 딸이라는 핏줄은 속일 수 없었다. 부친인 아웅산은 20대의 대학생신분으로 독립군을 조직해 영국군과 무쟁투쟁을 벌이다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눈앞에 둔 47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배신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그는 아웅산을 외치는 군중앞에서 『나의 아버지는 국민에게 총을 겨누라고 군대를 창설한 것이 아니다』라며 거침없이 군사정권을 공격했다.

항쟁이 번지자 군부는 89년 7월 20일 소요선동 혐의로 그를 가택연금시켰다. 그러나 수지여사가 창당한 민주국민동맹(NLD)은 지난 90년 5월 총선에서 75%의 지지를 얻는 압승을 거두었다. 91년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수상식에는 남편인 아리스와 자녀만이 참석해 더욱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군부는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법까지 개정하면서 그에 대한 연금시한을 5년으로 늘렸지만 미얀마 민주화에 대한 염원의 불길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다. 또한 군사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망명유도등 회유책을 내놓았지만 수지여사는 이를 꿋꿋이 버텨냈다.

미얀마 군부정권이 수지여사에게 가택연금을 해제하게 된 것은 노벨상까지 수상한 수지여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대한 압력에 굴복한 측면도 있지만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각종 지원이 끊기는등 경제상황악화로 최빈국으로 전락하고만 현실적인 요구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올해 초 상하 양원을 장악한 미공화당의 보수파의원들은 미얀마에 대한 경제제재 강화를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나서고 국제적십자사(ICRC)는 미얀마 주재 사무실을 폐쇄키로 결정, 국제사회의 대미얀마 압력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이 가운데 태국 말레이시아등 주변국들이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아시아의 4마리 호랑이」로 부상한 반면 고립 무원의 미얀마가 아시아의 최빈국으로 전락하고만 현실이 자칫 정권 붕괴로까지 이어질수 있는 선택을 군사정권측에 강요한 것으로 분석된다.<조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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