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희망의 땅끝과 그리운 미래/조태일의「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시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희망의 땅끝과 그리운 미래/조태일의「풀꽃은 꺾이지 않는다」(시평)

입력
1995.07.05 00:00
0 0

모든 것이 막막했던 유신시대에, 조태일은 발매가 금지된 두 권 시집의 저자였다. 소지하는 것조차 죄가 되는 그 시집을 독자들은 읽을 수 없었지만, 유언비어에 오직 희망을 걸었던 정황에서, 누군가가 금서를 기획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리품, 그러나 외로운 전리품이었다. 이어 시대가 더욱 피비린내를 풍길 때 그는 덜 외로울 수 있었는데, 그를 뒤이은 젊은 시인들이 더욱 치열한 목소리로 그를 앞질러 버린 것은 이중의 아이러니이다. 그리고는 새 시집의 「풀벌레들의 노래」에서처럼, 이제 풀벌레들이 「하늘 끝과 땅 끝이 포개지는 곳에서」만 노래하는 시대, 다시 외로움을 다감하게 견디어야 하는 시대가 그에게 왔다.시집의 제목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가 민중주의 초기의 60년대식 화두를 다시 취하고 있는 것도 이 외로움과 관련된다. 투쟁은 함께 하는 것이라도, 한 인간의 전존재를 걸어야 하는 그 싸움의 모든 고비에서 그 의의를 다시 새기는 것은 각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조태일은 그가 믿음을 얻었던 최초의 순간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여전히 시의 도움을 받는다.

「태안사 가는 길 2」에서 시인은 어머니를 모시고 절로 간다. 대문을 나서며, 여러 개의 다리와 산문을 넘어서며, 그는 늙은 어머니를 염려하며 「어머니, 어머니」 부른다. 그때마다 「오오냐, 오오냐」 대답을 듣는다. 아니, 지장경의 독송으로 끝나는 이 시에서, 그가 모시고 가는 것은 세상를 떠난 어머니의 혼령이 아닐까. 시인을 동행하고, 그가 안부를 물어야 하는 것이 늙은 어머니라면, 그것은 시인 스스로 봉사하는 신념이 그 자신의 삶과 진정으로 결부되어 있는가를 묻는 셈이 된다.

그가 혼령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시인의 오랜 희망이 인간역사의 시작과 함께 기약된 그 희망과 동일한 것이며, 그 약속이 미래에도 내내 유효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나 같다. 삶을 온통 차지해야 할, 그러나 삶과 역사를 넘어서는 그리움이 거기 있다. 「땅 끝은 끝이 없어라 향기 끝은 끝이 없어라」라고 「해남 땅끝의 깻잎향기」는 말한다. 그리움의 시가 또한 그렇다. 그런데, 「돌깻잎 위에 밤비 내리고 돌깻잎향기 바다를 잠재운다」. 열망을 만드는 것도, 그 열망을 잠재워 그리운 세계를 얼핏 보여주는 것도 시이다.

한 시대의 싸움이 비록 그 효력을 잃는다 해도, 그 과정의 여러 순간에, 숨었던 물줄기처럼 다시 나타나는 시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어제 싸웠던 시는 오늘 그 희망을 땅끝에, 미래에 유전한다.<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