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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반란과 변혁의 “영원한 로커”(가요 30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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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반란과 변혁의 “영원한 로커”(가요 30년:1)

입력
1995.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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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던 음악인생 가요사 축소판/솔뮤직 「봄비」 등서 첨단감각 발휘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싣고 흐르는 대중음악은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커다란 변혁기를 맞았다. 록과 솔등 서구의 대중음악을 한국화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일었고, 이러한 흐름은 지금까지 도도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이는 우리 대중음악이 그 무렵부터 세계적 흐름에 편입되어 호흡을 같이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와 자유의 뜨거운 상징인 대중음악의 주도권이 기성세대로부터 젊은이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화하고 있는 시점에, 지난 30년간 명멸했던 수많은 스타 가수들과 노래를 통해 지나 온 변화의 발자취를 그려 본다.<편집자주>

신중현(57)은 언제나 우리 대중음악의 핵심에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칭찬도 받았으나, 음악적 논쟁이 일어났을 때도 그 속에서 선구자의 노역을 피하지 않은 치열한 음악인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인기곡과 그에 못지않은 금지곡, 대마초와 관련한 개인적인 수난등 그의 음악인생은 우리 가요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1938년(호적에는 1943년) 서울 중구 왕십리(신당동 일대)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신중현은 국민학교때 부모를 여의고 소년가장으로 자랐다. 제약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고 야간 중학교(동양중) 2학년 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지작거리던 기타가 그의 인생을 정해 주었다.

그는 서라벌고 2년때 학교를 그만 두고 기타학원의 강사로 나섰고 58년 미8군 스프링 버라이어티 악단에 들어가 프로무대에 진출했다. 그후 37년, 현재 수원여전 강단에서 대중음악 이론과 기타를 가르치며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나는 40년 동안 음악만 했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보낸 과거에 후회는 없다. 앞으로도 기력이 있는 한 기타를 치고 작곡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세 아들도 가업인 대중음악을 하고 있다.

「20년을 앞서 간다」는 그의 음악은 끝없는 실험정신으로 점철돼 왔다. 외래 음악을 클래식과 재즈로 2분하던 시절, 신중현은 이미 창작·연주·노래를 한몸으로 해내는 토털 뮤지션이었다. 62년 국내 최초의 그룹사운드 「애드포(ADD 4)」를 조직해 「빗속의 여인」등 14곡을 LP에 담아 발표했다. 이 음반은 이후 거세질 팝음악의 신호탄이었다.

73년 발표한 연주시간 18분의 국내 최장 가요 「아름다운 강산」, 70년 박인수가 부른 국내 최초 솔뮤직(요즘 용어로 흑인음악) 「봄비」등은 그의 첨단적 감각을 말해준다. 「님아」가 신효범, 「미인」이 그룹「봄여름가을겨울」에 의해 리바이벌돼 현재도 인기를 누리고 있음은 또 말해 무엇하랴.

<한 번 보고 두 자꾸만 싶네 그 누구의 애인일까 정말로 궁금하네…>

5척 단구에 벙거지를 눌러쓴 우스꽝스런 차림에 탁한 목청을 뽑으며 「미인」을 대히트시키던 모습도 가요계의 역사적 초상으로 기록될 만하다. 그의 음악은 외국 음악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우리 것으로 재창조한 점에서 빛나고 또한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전후의 황폐하던 시절에 청계천을 뒤져 구한 교본으로 기타를 배우면서 우리의 것을 생각했던 그는 빈대떡과 피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신세대 음악도에게 큰 교훈을 남긴다.<권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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