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쥐를 잡아 먹고 산다. 쥐를 잡아 먹고 사는 고양이의 눈에는 모든 쥐가 밥으로 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양이도 쥐를 잡아 먹는 권리를 행사함과 동시에 쥐가 몸을 피할 영역은 인정해주고 있는 듯하다.나는 그것을 청평사에서 보았다. 어느 날 오후 마당에서 산보하다가 고양이에게 쫓기는 커다란 쥐 한 마리를 보게 되었다. 그 쥐는 풀덤불 하나 없는 마당을 건너 축대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고양이와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것을 본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되어 제발 쥐가 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쥐는 축대 못 미쳐서 그만 고양이에게 물리고 말았다.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며 쥐는 사력을 다해 발악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버거웠는지 고양이는 물었던 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쥐는 축대 밑에 허연 배를 드러내 놓고 벌렁 나둥그러졌다.
그러나 고양이의 재공격이 가해질 무렵 쥐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옆 축대의 돌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난감해진 고양이는 돌틈을 들여다 보며 한동안 허둥대더니 몇걸음 옆으로 물러나 축대에 몸을 찰싹 붙이고 낮게 엎드렸다. 숨어서 쥐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쥐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얼마 후 부시시 일어난 고양이는 체념한 듯 몇 번인가를 뒤돌아 보며 어슬렁 어슬렁 산쪽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곧 쥐가 피신한 돌틈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간주하는 모습이었다. 그 후로 마당에 나가 산보할 때마다 나의 눈길은 그 돌틈에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그 돌틈을 볼 때마다 지난 6월6일 현충일에 조계사와 명동성당에 진입해 농성중인 한국통신노조원들을 연행해간 공권력이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법집행에 성역은 없다」는 권력의 말은 결국 약자가 피신할 이 사회의 돌틈에 시멘트를 발라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동물의 세계가 어찌 인간사회와 비교될 수 있으랴마는 우리의 인간사회가 결국 약자의 피신처를 용납하지 않는 강자의 논리로만 가득차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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