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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밑이 어둡다(틈으로 본 세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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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밑이 어둡다(틈으로 본 세상:5)

입력
1995.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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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일방적·표피적 서양과학으론 혼돈시대 대응에 한계/우리사상의 보고 「마당」 「풍류」 「동학」 등서 길 찾아야최근 우리 것을 찾자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 문화 가운데에서 새로운 창조적 세계성을 찾아내 우리 나름의 세계화를 하자는 얘기다. 이런 얘기에 접할 때마다 생각나는 일이 있다.

1972년 7·4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나서 북쪽대표단이 서울에 왔을 때다. 그쪽에서는 가장 탁월한 「리론가」라는 윤기복이 남한 작가들을 만나 의기양양, 뻐기며 한 마디 하기를, 『우리는 현대극에서 가장 어려운 방백문제를 드디어 해결했지요』

현대극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방백을 무리없이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몹시 감동한 한 작가가 침을 튀기며 전하는 말을 한참 듣고 있다가 나는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북쪽 연극이란 게 크게 보아 스타니슬라프스키나 고든 크레이그, 마이어 홀트의 액자무대를 못 벗어난 것이고 브레히트 따위는 채 꿈도 못 꾸는 상태, 하긴 그 한계 안에서 방백처리를 했으니 미의식의 잉여가 많이 성장했다는 뜻으로 스스로는 대견할 것이다. 하나 그 지독한 신파에다 방백까지 개칠해 놓은 꼴을 무슨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헛똑똑이! 등잔밑이 어둡다는 생각이 그때 떠올랐다.

○액자무대로부터의 탈출

나는 그때 그 작가에게 다시 만나거든 이렇게 전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프로시니엄(무대)을 아예 걷어 치웠다. 우리는 지금 「마당」에서 춤추고 「판」에서 논다. 브레히트마저 꿈도 못 꾸던 그 마당과 판에서!』

그 무렵 우리는 「마당굿」이니 「굿판」이니 하는 연행형태를 대중화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통탈춤과 굿과 소리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액자무대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며 노심초사하던 서양연극계, 기껏해야 아직도 액자를 완전히 청산 못한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노(능) 또는 가부키(가무기)에서 최고의 탈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하던 서양연극인들에게 이 「마당」은 큰 경악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후, 내가 오랜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뒤 가만히 살펴보니 「마당」은 정치선동으로 상투화하고 「판」은 그런 정치선동에 더 적합한 프로시니엄이나 아치 속으로 도로 기어 들어가 오늘날엔 다시금 액자에 갇힌 저 뻔할 뻔자의 서양 불봐르연극이 판치고 있다. 우리의 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당」과 「판」은 다시 부활되어야 한다. 마당의 시간은 액자의 시간과 전혀 다르다. 액자의 시간이 과거로부터 미래로 직선적 가속적 비가역적으로 흐르는 목적론적 종말론적 역사주의의 시간이라면 마당의 시간은 「지금 여기」서 사방팔방 시방의 전방위로 확산하고 다시 지금 여기로 수렴하며 마당이 바뀜과 함께 차원변화하여 또 다시 확산하면서 굿과 극의 질적 내용이 가역적으로 유기화·고도화하는 우주생명의 질적 확산진화의 시간이다. 그러니 춤사위나 재담도 「사방치기」나 「사방뿌리기」가 되며 춤과 동작선은 「비정비팔」의 도약적 사방확산과 음양·태극의 무궁한 복잡화형태로 나타나고 관객의 시각은 이른바 「시각의 시너지(SYNERGY)」현상인 「협동적 시각」으로 차원이 크게 변한다. 완전히 열려 있는 「판」이다. 그러매 관객들이 「추임새」를 넘어 시비를 걸 정도로까지 판에 개입하지 않고는 근질근질해 견디질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엔 신명이 나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게 되는 것이다.

○21세기 예술에 새빛가능

나의 이런 「마당론」을 듣고 있던 서구의 한 지식인은 언젠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국인은 21세기 문화의 등불입니다』

자, 그런데 지금 동숭동풍경은 어떤가?

등잔밑이 어둡다!

어찌 탈춤의 마당뿐이랴! 도자기와 건축과 민예·민화로부터 판소리와 산조음악들에 이르기까지 그보다 더 섬세하고 오묘하고 독특한 숱한 미학원리들로 가득 차 있다. 21세기 카오스문화의 핵, 이른바 「무질서의 미」의 심오한 미학질서가 여기 보물창고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박을 타면서 동시에 박을 빠져 나가는」 기법인 판소리의 「잉에걸이」가 퍼지와 카오스와 역설이 지배할 것이 분명한 21세기예술에 새 빛을 던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억지를 쓸 것인가? 그래도 여전히 「벨칸토」숭배만 고집할 것인가?

○원효 화쟁사상연구 미흡

그러나 우리 문화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상과 과학의 창조성이다. 이미 풍류도의 「한」사상이 다가오는 불확정성과 복잡성, 카오스과학과 생명시대의 새 사상의 원형적 가능성이라는 의견은 김상일 교수에 의해 주장되었고 원효의 화쟁사상은 바로 이 「한」과 「풍류」의 생명론적 틀로 십문으로 분열된 불교의 제 경향을 탁월하게 통합함으로써 당대 동북아사상계의 기린아였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현대적 삶의 도전과 동·서양사상의 종합, 불교와 제 종교의 접근이라는 절실한 요청에 대답할 뛰어난 바탕틀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몇 분의 정열적인 연구이후 근자엔 적막강산이다.

지구생태계 파괴가 극에 이르고 생태학이 전학문의 기본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때, 오히려 서양의 유수한 환경운동가, 생태학자들이 그 한계를 개탄하며 풍수학에 최종적 기대를 걸고 있는 판인데도 국내의 과학자, 환경운동가, 생태주의자들은 풍수학 알기를 마치 타다 남은 부지깽이로 안다.

풍수에서는 이론적인 형세론보다 지기에 대한 기감을 더 중요시한다. 보이지 않는 지기에 대한 직관적 기감이 없으면 보이는 맥세나 생태 따위만 관찰하여 추측하는 이론적 과학으로는 땅의 온전한 생명흐름을 알 수 없으며 알 수 없으면 근본적 치유와 회생도 없다.

제임스 러브록의 지구생리학, 지구의학도 눈에 보이는 지구장기론이나 세포론이라고 할 지질학, 생태학, 해양학 따위만으로 지구생명을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히려 암석과 토양과 식생과 수맥과 대기와의 유통 전체를 결정하고 지배하는 기맥과 기혈을 직관적으로 기감하는 풍수학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별 무소용일 것이다.

요즘 우주 전체의 이상한 변동이 오고 있다. 서양의 우주과학은 이것을 해명하지 못한다. 복희역 문왕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뒤엎고 우주의 대역전을 주장한 김일부 선생의 정역의 비전이 서양우주과학과 결합되어야 이 문제가 해명될 것이다. 그런데 정역을 우리는 알고나 있는가?

물질과 유기체와 영성 전체를 우주생명활동인 기로 일관하여 인식하지 않으면 삶과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소수이긴 하나 예견력있는 뛰어난 서양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런데 기학중의 가장 현대적 기학인 최한기의 신기론이나 추측론, 동양의학 중에서도 창조적 암시의 전율로 가득찬 이제마의 저 독특한 사상의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금 국내에서 어느 정도인가? 단전학과 경락론은 인체의 신령한 우주적 생명활동의 깊은 비밀을 꿰뚫어 알 수 있는 감추어진 보물창고다. 그런데 한국의 생명과학자들은 이것을 지금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북한의 김봉한이 발견했다고 요란하게 떠들어댄 물질적 소체로서의 경혈, 실재적 관으로서의 경맥이나 그 속을 유주한다는 액체, 한 술 더 뜬 「산알」론 따위는 모두 다 허구다. 북한 주체과학의 한계가 바로 이런 것이다. 기는 물질이 아닌 것이다. 그러매 깊은 직관과 과학적 검증의 탁월한 결합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동학의 불연기연(아니다 그렇다)의 역설적 탐구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위대한 우리 사상중의 노른자는 동학이다. 인간 안에 무궁한 우주진화의 3법칙(안으로 신령한 의식, 밖으로 기의 복잡화, 그리고 우주적 전체유출을 개체들이 개별적으로 다양하게 실현함)이 생성하므로 그것을 모신 인간이 바로 신령무궁한 우주생명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필경 최근 제기되는 네오 휴머니즘의 핵심이 될 것이요 기가 과거 동양학의 그 기요 태극이로되 동시에 그 기가 아닌 극에 이른 카오스기, 「혼원지일기」 즉 지기요 궁궁이라는 점, 이래서 카오스시대의 새로운 창조적 기사상, 우주생명사상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여 「지금 여기」로 되돌아 오는 질적·확산진화론으로서의 무궁한 생명과 삶의 그 전방위적·네트워크적 생성의 시간관이야말로 서양적 시간관과 목적론적 역사주의가 부딪친 한계를 뛰어 넘을 새로운 근본우주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것 찾자고 하니까 유교부활론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쳐들고 효도타령·충성타령이 요란하다. 그러나 지금은 문명사 전체의 대전환기라 유교로 해결되는 때가 아니다. 동학이 제시한 새 척도와 새 비전, 새 생명론을 중심으로 유교등 전통사상과 서양학등을 모두 해체하여 새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문명전환의 요체인 혼돈학으로서의 새로운 우주생명학이 탄생할 것이다. 허름한 듯 하나 더없이 귀중한 바로 이 척도, 이 비전과 새 우주생명론을 내장한 동학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꾀죄죄한 아전유학, 아니면 혹세무민의 유사종교쯤 아닌가!

등잔밑이 어둡구나!

그런데 갑오동학혁명 실패이후 우리 것을 죄 잃어버리고 서양것과 서양의 잡종인 일본것이 판을 쳐온 이 백년동안의 「등하불명」은 도대체 무슨 뜻을 갖는 것일까? 이 오래고 캄캄한 「빈 틈」이 아무 뜻도 없단 말인가?

얼마전 내가 좋아하는 한 젊은 화가가 이런 얘기를 했다. 『어렸을 때 장난감이 없어 아버지가 흰 누에고치 다섯 개를 나와 동생에게 갖다 주었지요. 두개는 갖고 놀고 세개는 서랍속에 넣어 두고는 오랜 시간 잊었습니다. 그런데 한참후에 우연히 서랍을 여니까 그 속에서 난데없이 새하얀 나비 세 마리가 후닥닥 튀어 나와 허공으로 할랑할랑 날아갔습니다』

○창조적 부활의 신비체험

등하불명, 이 빈 틈의 비밀은 바로 부화, 또는 어변성룡의 비약적 차원변화, 창조적 부활의 신비다. 이것이 우리의 개성화, 지방화, 세계화를 관통하는 포태의 비밀이다.

포태. 감옥과 같은 자궁속의 그 캄캄한 「빈 틈」! 그 속에서의 길고긴 백년동안의 기다림, 그 쓰라린 한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새 창조력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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