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산골출신 1천만 시민 살림꾼으로/“가난한 조국 구제” 31세때 미 유학길/80년 입각제의 “정통성에 문제” 거절/경제부총리·한은총재시절 “외압에도 소신 관철”6·27지방선거의 「빅3」중 민주당의 조순(67) 후보가 「빅1」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날 개표 초반 엎치락뒤치락 하던 조후보와 무소속 박찬종 후보간의 박빙의 접전은 투표함이 속속 열려갈수록 조후보의 리드로 윤곽이 굳혀갔다.
강원도 산골의 책읽기를 좋아하던 소년이 학자와 행정가의 길을 거쳐 1천만 서울시민의 살림살이를 책임질 살림꾼으로 다시 변신하는 것이다. 조후보의 당선으로 4·19혁명 직후 취임한 「카이제르수염」 김상돈 시장에 이어 34년만의 민선시장이 태어나는 것이다.
1928년 2월 강원도 명주에서 태어난 조후보는 강릉 중앙국교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온 모범생이었다. 광복직후 경기중학시절에는 당시 유행하던 독서회에 가입, 사회주의서적을 탐독하다 퇴학처분을 받은 일이 있어 이번 선거 막바지에 전력시비에 휘말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서울대 상대 전문부를 졸업하고 전쟁중인 52년 육사영어교수요원으로 선발된 그는 육사 11기였던 전두환 노태우 생도와 사제지간으로 만나게 된다. 그는 이같은 인연으로 80년 당시 전두환 국보위위원장의 끈질긴 입각제의를 받았지만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거절했다. 57년 제대한 그는 아내와 세아들을 둔 31세의 나이에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만학의 미국유학길에 오른다.
그가 유학한 미국 보든대학은 「한국의 케인스가 돼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가난한 조국을 구제하고자 하니 열혈청년의 뜻을 꺾지 말아달라」는 한국청년의 간곡한 자기소개서에 감동, 입학허가서를 보냈다.
9년만에 귀국한 그는 만 40세의 나이로 서울대 상대 부교수가 되면서 학자의 길을 걸었다. 미국에서 정통경제학을 공부한 신예 교수의 명강의는 캠퍼스의 화제가 돼 정운찬(서울대) 김태동(성균관대) 교수등 수재들이 휘하에 몰려들어 지금의 「조순 학파」를 형성했다. 그가 경제학교수시절 저술한 「경제원론」은 요즘도 경제학의 바이블로 불리고 있다.
그의 첫 외도는 올림픽 직후인 88년12월 육사제자였던 노대통령이 김복동씨를 통해 경제부총리로 영입하면서부터다. 그는 1년4개월동안 부총리로 재직하면서 한국중공업의 민영화와 금리인하등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갈등을 빚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직후 한국은행 총재에서 퇴임하는 길에 한 한은직원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린 일화가 있을 만큼 그는 존경받는 「거목」이었다.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인 48년 가을 고향 이웃마을의 17세처녀 김남희(64)씨와 결혼, 기송(46·LG전자 기획 및 해외투자담당상무), 준(42·소아과의사), 건(40·대연금속(주)대표이사), 승주(32·포항공대 박사과정)등 네아들을 두었다. 한은총재시절 사업가인 셋째가 부도위기에 몰렸는데도 『자기가 뿌린 씨는 스스로 거둬야 한다』며 한푼도 도와주지 않은 일은 유명한 일화다.
조후보는 이날 당선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말을 아꼈다. 당선이 거의 확실해진 직후 그는 기자들과 만나 『인사와 정책결정을 투명하게 하고 모든 행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조화로운 시정을 꾸려나가겠다』는 그는 또 『시민들과의 거리를 좁히는데도 최선을 다할 방침』이라며 『공정하고 공개적인 시정운영을 통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시민들은 미국 유학시절 생활비가 부족해 고무신까지 집에서 우송해 신고 다닌 조후보의 억척스러움이 시정에 그대로 반영되길 바라며 진정한 「서울포청천」의 탄생을 기대했다. <고재학 기자>고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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