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갈등 녹여낸 글 쓰고파”/등단 10년만에 첫 문학상받아 기뻐/초기의 감수성잃은것 같아 후회도제2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가로 중편 「먼길」을 발표한 김인숙(32)씨가 선정됐다. 시상식은 7월7일 하오 3시 한국일보사 13층 송현클럽에서 열린다. 수상자 인터뷰와 심사평을 함께 싣는다.<편집자주>편집자주>
83년 대학을 다닐 때, 김인숙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면서 「생판 모르는 사람 앞에 속옷 한 자락을 보여준 것 같이」 몹시도 「부끄럽다」고 했다. 여고시절부터의 습작이 제대로 된 작품으로 평가받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되고 읽혀지는 기분을 표현한 말이었지만, 정작 그가 감내해야 할 부끄러움은 그 뒤에 더 크게 다가왔다.
80년대, 정치·사회적 억압과 인권유린의 어두운 그늘이 사회를 감싸고 있을 때 그는 대학캠퍼스의 남녀가 벌이는 자유분방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상실의 계절」로 등단했고, 그 해 역시 대학생들의 동거생활, 불감증, 근친상간, 자살등 성을 매개로 젊은이들의 자유를 향한 욕구를 묘사한 장편 「핏줄」을 써냈다. 센세이셔널리즘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지만 정작 작가는 또래의 학생과 독자들로부터 무수한 질타를 당했다.
김인숙은 그 이후 변화를 시도한다. 「시대현실의 문학적 형상화」로 요약되고 또 그런 이미지로 많은 독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문학작업은 이때부터 새롭게 출발한 것이다. 도시빈민의 삶을 다룬 장편 「불꽃」(85년)을 시작으로, 70년대말 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을 세밀히 조각해 낸 「79∼80 겨울에서 봄 사이」(87년)를 거쳐, 작품집 「함께 걷는 길」(89년)을 내기까지 그는 「운동」이라는 대열의 언저리 어딘가에 서서 문학이라는 날 무딘 연장으로 사회와 긴밀히 조응하는 글을 써 냈다.
그리고 등단 10여년 만에 그는 문학상이라는 이름이 붙은 상으로는 처음 한국일보문학상을 받게 됐다. 93년 겨울부터 1년여동안 살았던 호주를 배경으로 한 「먼 길」은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가 보여준 「과거와의 화해」와 사회 구석구석에서 끈끈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70년대 통기타 가수생활을 하면서 발표한 노래가 금지곡이 되고 경찰에 끌려가 고문당한 뒤 고국을 떠나온 유한림, 형을 좇아 기술이민 형식으로 호주땅에 들어와 8년 넘게 살았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안정된 직장을 팽개치는 동생 한영, 한국에서의 짧은 학생운동경력을 갖고 난민신청이라는 이례적인 경우로 호주에 정착하게 되는 강명우. 작품은 이들 3명이 조국에 대해 품고 있는 한과 이국의 땅에서 겪는 갈등을 줄거리로 한다.
이질감과 소외의식을 모티브로 그들이 떠나와 살 수밖에 없는 연유를 천착해 들어간 작가는 박해로 촉발해 고국에 대한 증오로 번지게 된 타향살이를 벗어나 그들이 스스로 「이민으로도, 난민으로도 만들지 않을」 땅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세 남자의 삶의 모습에 작가는 이른바 후일담의 한 대목을 삽입했다. 명우와 한영이 말하는 「내 길은 헛되지 않았는데 내 삶이 헛되어졌다」거나, 「패배고 결국 부끄럽다」는 감정은 몇 년 전과는 다른 세월을 살아야 하는 작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시대정서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등단작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도 비판의 시선에 몸둘 바를 몰라 했고 등단 초기의 섬세한 감수성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 조금은 후회된다』는 그는 『글을 쓰거나 생각하는데 편협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지난 시절을 이야기했다. 그는 호주에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을 받게 되어 기쁘다며 『시간이 우리의 지난 시절을 좀 더 넉넉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80년대를 추스르면서 오늘을 살아 가는 여러 사람들의 고민과 갈등을 녹여낸 중·단편을 써 내고 싶다』고 한다.<김범수 기자>김범수>
◎심사평/지난시대아픔 감동적형상화 「먼길」/최종심서 다른 2편과 경합끝 영예
이번 심사의 예심은 넓은 풀밭 위에 떨군 바늘을 찾는 일과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대상이 94년 5월부터 95년 4월까지 이 나라의 50개 가까운 문예지에 발표된 수백 편의 중·단편들에다 원칙적으로는 그 기간에 발표된 장편까지 포함되는 까닭이었다. 1차 모임에서 토의끝에 7명의 작가와 작품을 검토대상으로 골랐으나 그러한 선정의 정확성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내년부터는 별도의 예심과정이 있어야 할 것같다.
그 일곱편 중에서도 결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은 김인숙의 「먼 길」과 송기원의 「사람의 향기」, 그리고 공지영의 「광기의 역사」였다. 송기원의 「사람의 향기」는 근년의 가작 「아름다운 얼굴」을 넘어서는 원숙함이 있었으나 자칫 식상하기 쉬운 구투의 주제와 문틀에다 지나치게 드러나는 자기연민의 흔적들도 심사위원 전원의 호감을 얻어내는 데는 흠이 되었다. 그에 비해 공지영의 「광기의 역사」는 신세대 나름의 깊이있는 자기성찰과 젊고 신선한 감각으로 보다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역사인식이라기보다는 사적인 교육체험의 나열같은 느낌에다 불투명한 주제가 흠이 되어 역시 심사위원 전원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김인숙의 「먼길」도 한 심사위원의 유보로 쉽게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유보는 지금보다 좀 더 잘 쓸 수 있었다는, 혹은 이 작가가 진정으로 절실하게 형상화할 수 있는 주제는 달리 있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유보라 수상작으로 결정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한 시대의 아픔은 여러 형태로 사람들의 영혼에 각인된다. 김인숙의 「먼 길」이 다루고 있는 것도 80년대라 이름하는 시대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남긴 상처를 더듬고 있는 점에서는 지금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후일담소설의 범주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대단할 것도 없는 투쟁의 경력을 무슨 훈장처럼 달고 과도한 비분에 빠져 있는 여느 후일담들과 궤를 달리 하는 것은 그 상처를 드러내는 기법과 그 봉합의 방식에 있다.
여기서 상처는 이제 더 이상 훈장이 아니고 고집되는 것도 가망없는 항전의 노래가 아니다. 패배와 실패는 때로 자인함으로써 아름다워지고 감동적이 될 수도 있다. 예상과는 달리 진행된 시대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방향도 자못 전향적이지만 비굴하지 않다. 거기다가 중요한 배음을 이루는 이국정취와 안정감있는 문체는 지난 시대의 아픔을 가슴 짜릿한 감동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따라서 심사위원 전원이 최종적으로 김인숙의 「먼 길」을 제28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데 그리 오랜 논란은 필요하지 않았다.<심사위원=김윤식·김병익·이문열·최원식>심사위원=김윤식·김병익·이문열·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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