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걸린 통합… 병사들 한발의 총성에 “와르르”/민족보다 정치적 계산 우선한 추진이 내란불씨베트남의 무력통일과 독일의 흡수통일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영향을 준 대사건이다. 이에 비해 아라비아반도 남단의 빈국 남북 예멘이 90년 이룩한 통일은 세계 현대사상 초유의 합의통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파장은 다분히 지역적인 범주에 머물렀다. 그러나 예멘통일은 4년후 내란으로 이어져 결국은 무력에 의한 재통일의 길을 걸어 세계를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합의통일은 왜 깨지고 말았는가. 이질적 정권간의 합의에 의한 통일방식은 결국 취약한 것인가. 예멘의 불행한 현대사는 통일의 성격이 바뀜으로 해서 오히려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나라는 흡수통일도 무력통일도 아닌 합의와 협상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멘의 통일과정은 우리에게 우선적인 연구대상이다. 우리는 예멘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멘의 정치인 학자 언론인 일반시민들과 이야기하면서 한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합의에 의한 통일방식 그 자체를 결코 탓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통일이 비록 전쟁을 불러오고 말았지만 전쟁이 결코 합의통일의 결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멘통일은 72년 남북 지도자간의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18년이라는 길고긴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통일예멘은 94년 5월 구남북예멘 병사간의 총성 한발로 삽시간에 무너졌다. 스커드미사일 공격을 주고받는 치열한 내전이 두달간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구 북예멘은 통일협상 테이블을 맞댔던 구 남예멘 지도부를 완전히 축출하고서야 통일을 완성했다.
해외 언론들은 내란이 발발하자 예멘의 통일은 성급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대다수 예멘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중도주의 신문인 예멘타임스의 알 사카프 편집국장은 『예멘은 이미 83년부터 일부 제한이 있었지만 자유왕래와 우편물 교환등을 시작했다』며 『통일의 준비는 행정·제도적으로 볼 때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정치인이다. 예멘통일은 정치인의 뜻이라기보다는 국민의 뜻이었고, 변화된 국제정세가 이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통일을 권력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했다. 통일이 성급했다면 이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계산이 너무 성급했다는 말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나대의 알 샤리프교수는 구 남북 지도부간의 권력투쟁과 불신이 합의통일의 실패를 가져온 첫번째 요인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남북을 막론하고 많은 예멘국민들은 내란이라는 말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94년의 전쟁이 민족간의 전쟁(CIVIL WAR)이 아니라,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구 북예멘의 살레정권과 구 남예멘의 알 아베이드정권의 핵심적 추종세력이 일으킨 「친위쿠데타」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을 선포하는 양측 지도자의 머리 속에는 이미 권력의 연장, 권력의 재창출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예멘은 통일선포 후 93년 총선 때까지 대통령5인위원회라는 과도정부기구를 두었다. 이 위원회로부터 하부 행정조직의 모든 포스트에 권력은 남북에 정확히 50대 50으로 분배됐다. 겉으로는 화합의 명분이 그럴싸 했지만 속으로는 상호견제와 지분 지키기로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 국가관리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었고 행정은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이같은 이완기에 부정부패가 싹트지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권력투쟁은 전쟁을 통해 승자와 패자를 갈랐지만 그 후유증은 지금도 통일예멘의 앞날을 막고 있다. 통일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부세력과 측근의 볼모가 돼 과감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예멘통일의 교훈은 결코 먼데 있지도 않고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통일협상이 아무리 길고 충분하다해도 위정자들이 민족에 앞서 권력을 생각할 때 통일은 언제라도 다시 붕괴될 수 있다는 평범한 것이었다.<사나=한기봉 특파원>사나=한기봉>
◎내가 본 통일현장/내전체험한 조규태 주예멘대사/남북 권력다툼… 충돌은 필연/“통일 정치적이용땐 불행” 교훈
93년 7월 부임한 조규태 주예멘대사는 통일 과도기간에 일어난 예멘내전을 생생히 체험한 유일한 한국외교관이다. 조대사는 한국대사관 근처에 스커드미사일이 터지는 와중에서 한국교민을 무사히 철수시켰다. 조대사는 예멘통일의 문제점을 통일 과도기에서 찾고 있다.
예멘의 통일과정이 독일 베트남과 다른 점은.
『예멘통일은 18년에 걸친 점진적인 것이다. 20여회의 정상회담등 각급 레벨의 협의를 통해 통일헌법 초안작성, 통행자유화협정 체결, 석유공동개발회사설립등 기본적 여건을 마련했다. 이처럼 통일의 출발은 경제적 우위나 군사적 우위에 의한 독일 베트남의 경우와는 달리 정치적 합의에 의한 동등한 것이었다』
합의통일이 깨지고 무력으로 재통일된 이유는.
『구 남북예멘 지도부는 과도기간 세력기반을 확장, 93년 총선에서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군대통합에 소극적이었다. 바로 이점이 화근이었다. 93년 총선에서 계산과 달리 제3당으로 패배한 남예멘 사회당은 정국운영을 보이콧했고, 양측간에 높아진 위기의식은 결국 군막사에서 일어난 사소한 충돌을 전면전으로 확대시켰다』
그렇다면 내전은 필연적인 것이었나.
『양측 지도부가 권력 재분배나 통합을 위해 사심없이 노력했다면 통일은 원만히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립과 반목이 심화된 상황에서 내전발생은 필연적이었다』
예멘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일부에서는 예멘통일이 충분한 준비없이 이뤄졌다는 시각도 있으나 나름대로 많은 준비가 있었다. 그러나 양 지도자간의 권력투쟁 때문에 핵심적인 부분의 통합은 미비됐다. 예멘통일은 지도자들이 통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통일이 시험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사나=한기봉 특파원>사나=한기봉>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