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날이 왔다.4대지방선거의 날을 맞아 일찍이 없었던 동시선거의 혼선속에 어느 때보다도 후보자의 선택에 고심하여 이 순간까지도 깊은 고민에 빠진 유권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상당수의 유권자들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내온 홍보물을 앞에 두고 과연 이 사람들이 나와 내 이웃을 대표하고 지역의 행정책임을 맡을 만한 사람들인가에 대해 회의에 젖어 있기도 할 것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누구를 찍을 것인가로 고민했다면 이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이번 선거에 과연 투표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유권자도 있을 줄 안다.
지역에 따른 편차가 크기 때문에 일의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의 고민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광역 및 기초단체장 후보의 경우는 그래도 덜하지만 기초의원이나 광역의원 후보의 경우 시쳇말로 함량 미달의 후보가 그득한 곳이 적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투표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번 선거는 시민자치의 머릿돌을 놓는 정초선거이기 때문이다. 일회적으로는 누구를 선택하는가도 매우 중요하지만, 나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대표와 지도자를 고를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의 확립은 더욱 중요하다.
뚜렷이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고 기권하는 것은 시민자치의 귀중한 제도를 포기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하다못해 지방자치제도를 정착시키는데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후보가 선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투표해야 한다.
여기에서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할 것은 애당초 민주정치에서 선거라는 것이 반드시 최선의 재목으로만 판이 짜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성인이 다스리던 삼대라면, 철인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선거는 커녕 정치도 필요없을 것이다. 제임스 매디슨의 말처럼 인간이 모두 천사라면 정부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대규모 사회에서 시행되는 대의민주주의 하에서의 선거란 사지선다식 시험에 흡사하다. 좋든 싫든 선택은 주어진 보기 가운데서 할 수밖에 없다. 딱 맞아떨어지는 답이 없다는 이유로 선택하지 않고 백지를 내기는 곤란하다. 어쩔 수 없이 보기 가운데서 가장 근접한 답을 골라야 한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후보들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 가장 낫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좀 더 나은 후보들의 출마를 유도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겠지만 당장에 급한 일은 어차피 민주정치란 가능한 것 가운데서의 선택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투표에 임하는 일이다. 정치는 어차피 최선의 예술이 아니라 가능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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