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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에 나가면서(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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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에 나가면서(화요세평)

입력
1995.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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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투표일을 맞게 되었다. 누가 될까? 드디어 뚜껑이 열릴 순간을 생각하면 누구하고 내기를 건 바는 없건만도 마음이 짜릿해질 정도로 활기차고 재미있는 선거전이었다. 선거전을 이렇게 즐길 수조차 있게 된 공은 뭐니뭐니 해도 TV의 위력에 돌려야 할 것같다. TV라는 요술상자는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실로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이번에도 여실히 보여주었다.이건 물론 서울시장 후보중 소위 빅3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될지도 몰라 송구스럽지만도, 각 방송사가 다투어 출연시킨 그들의 연기력은 방송사가 가장 신경쓰는 시청률경쟁에서 어떤 인기프로도 추종을 불허하리만큼 출중했다. 처음에는 약간 어설퍼 보이던 후보도, 화면에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아 보이던 후보조차도 자신의 단점을 미덕으로 부각시키는 천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출연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그들의 연기력의 향상도 괄목할 만했다. 신인 유망탤런트가 인기정상에 오르는 과정보다 더 신속하고 눈부셨다. 한번도 미남이어서 좋아하거나 존경해본 적이 없는 후보들이건만 그들이 얼마나 괜찮게 생긴 남자들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발견한 것도 그동안이었다. 우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점잖고 근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그 분들이 몇명의 코디들에게 얼굴을 내맡기고 분첩을 두드리게 했을 생각을 하는 것도 이 따분한 세상을 그래도 살맛나게 하는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청자의 재미에 대한 욕구에 단련될대로 된 TV인지라 회가 거듭될수록 또는 방송사가 바뀔 때마다 용모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뭔가 새로운 걸 보여줘야했을 것이다. 저마다 잘하겠다고 설치기로 치면 구의원조차도 자기만 뽑아주면 세상을 바꿀 듯한 웅지를 펴는 판이니, 상대적으로 실현가능한 계획은 초라해 보이고 재미있기는 더군다나 틀린 일이다. 자연히 항간에 떠도는 그들의 과거의 실수 중에서 실증할 수 있는 걸 들이대어 그들이 그걸 어떻게 해명하고 세련되게 넘기나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게 가장 인기품목이었다는 것은 관훈클럽 특별회견에서 이미 입증된 바이니 시청률로는 보증수표감이었다. 과연 그건 근래에 보기 드문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고 우린 그걸 충분히 즐겼다. 사람이 살다보면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오판도 할 수 있고 보통사람보다는 정치가에게 있어서 그게 한층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이 되겠지만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보다는 덜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은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무안해 하는 기색조차 없이 유창한 말주변으로 그 고비를 잘 넘겼다. 혀를 내두르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말솜씨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들이 변명 못할 실책은 없으리라는 최고의 감탄은 결코 신뢰감하고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유권자 또한 오랜 세월 정치에 속고 부정부패에 우는 사이에 능구렁이가 다 돼 있다. 이번 선거가 결코 연기자 선발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실책을 변명하기에 능하다 보면 실책을 저지르는 것 또한 두려워 하지 않게 되리라는 전망도 할 줄 안다. 그동안 우리를 가장 재미있게 해준 건 연기가 뛰어난 후보였지만 투표장에 가기 위해 구두끈을 매면서 찍고자 생각하는 후보는 그 중에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덜 부정직한 후보이다.

그러나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격으로 시장선거놀음에 정신이 팔려있는 새에 시간이 너무 빨리 가버렸나 보다. 투표하러 가기 위해 구두끈을 매면서 비로소 구청장 구의원 시의원후보들은 누구를 찍을지 아직 마음을 못 정한 걸 깨닫게 된다. 그들에 대해 알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안한 유권자로서의 무관심도 반성 안하는 바는 아니나 선거분위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내가 서울시민이어서 서울시장선거 얘기만 늘어놓게 된 게 아니라, 서울의 위성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네 시장으로는 누가 입후보를 했는지 이름조차 모르면서 서울시장이 누가 되나에는 관심이 지대한 게 이번 지방자치선거의 이상기후였다. 자기 고장 살림꾼에 대한 관심보다는 현정부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가 더 궁금하고 그걸 알아보는데 있어서 서울시장이 누가 당선되느냐가 가장 정확한 잣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집권당과 야당이 먼저 그런 방향으로 국민감정을 유도하고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명백하게 지방자치정신에 어긋나는 일이고, 그 폐해는 엉뚱하게도 시장이나 도지사보다 지명도가 떨어지는 시나 구의원선거에서 표출될지도 모른다. 자기고장 살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이의 인격이나 행적에 대한 사전지식없이 투표에 임하게 된 유권자가 기권하기는 아까워서 어딘가 기표를 해야 할 곤경에 빠졌을때, 가장 확실하게 참고할 수 있는 게 당직밖에 없으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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