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교·사병 모두 “조국수호위해 희생” 사명감/후방배치제의도 뿌리치고 목숨건 전투나서『이렇게 살아 있으니 전쟁을 돌이켜 볼 수도 있군요. 그땐 살아남는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6·25전쟁의 최고 격전지를 누볐던 최일영(68) 예비역소장은 전선을 떠난지 40여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전장의 각오」로 살아 가고 있다.
『군인에게 가장 명예스런 죽음은 전장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치지도, 죽지도 않았으니 조용히 살아야죠』 그는 퇴역후 17년간 정부의 공직제의를 모두 마다하고 오로지 연금만으로, 자가용차조차 없이 살고 있다. 덤으로 사는 인생, 자유롭게 지내겠다는 생각이다.
1사단의 대대장등으로 다부동전투, 팔공산전투, 영천전투, 벽제전투, 노리고지전투등 전사에 기록된 대격전을 모두 치렀다. 평양을 지나 평북 운산까지 진격했던 그는 죽음의 고비를 무수히 넘겼다.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는 절망속에서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피값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싸웠다고 한다.
『6·25 당시는 장교 사병 모두가 참으로 순진했습니다. 오직 나라를 위해 우리가 희생돼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중에도 월급을 주는 것이 도무지 의아했다고 한다. 『전장의 군인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선에서 급하면 휴지로 사용되기도 했죠』
지금도 최소장이 6·25전쟁에 대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은 너무나 허술했던 우리의 방위태세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6월24일 갑자기 비상이 해제돼 장병들이 대부분 외박을 나갔죠. 거기다 박격포등 중화기들은 정비를 한다고 모두 후방으로 옮겨졌고 갑자기 사단장등 일선의 주요 보직 인사이동이 이뤄져 부대관리가 허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에게 「기습을 해주시오」하고 부탁한 꼴이었어요.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철저한 무방비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의심을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소장은 전쟁중 『능력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한때 소령진급을 거부했으며 후방근무나 유학제의도 『매일 장병들이 쓰러져 가는데 어떻게 전선을 떠나느냐』고 고사했다.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당초의 의지를 버리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나진중학을 졸업한 그는 47년 6월24일 새벽 어머니와 함께 38선을 넘어왔다. 고향인 함북 경원에서 두달 걸려 서울까지 2천리를 걸으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년간 공산치하에서 살아보니 인간이 살 세상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남으로 온 목적은 분명했어요.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없애겠다는 생각이었죠』 48년 3월 육군사관학교 7기생 모집에 응시, 군문에 들어섰다. 21사단장 국방대학원장직무대리를 거쳐 육군종합행정학교장을 마지막으로 78년 1월 전역했다.
최소장은 그동안 국영기업체 부사장, 조합 이사장등을 맡으라는 권유를 가볍게 물리쳤고 전국구 국회의원마저 거부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연금만으로도 굶지는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군직을 천직으로 안다면 어떻게 그런 자리를 바라겠어요』 그래서 그는 군내에 사조직을 만들었던 후배, 사기·복지 타령을 하는 후배들에게 할 말이 많다.
『내가 군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군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병의 군인관은 대쪽같았다.<대전=손태규 기자>대전=손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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