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아침이다. 45년전 그날과 같이 오늘도 일요일이다. 컴퓨터의 「만세력」을 보니 「일요일6·25」는 전쟁후 61, 67, 72, 78, 89년에 이어 올해가 6번째다. 윤년이 낀 경우 11년만에, 나머지는 5∼6년만에 요일과 날짜가 겹쳐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어찌 우리 잊으랴」던 이날 팔도에서 정성껏 모아진 쌀이 북한으로 가기 위해 동해항에서 채비를 끝내고 출항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다 한반도가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어 동족간에 총부리를 겨눠 피를 흘린지 45년. 풍요의 상징인 남쪽의 쌀이 평화의 전령인양 분단의 벽을 뛰어넘게 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민족과 사회와 가정을 산산조각낸 6·25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다. 한만이 켜켜이 쌓여 대물림할 뿐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다. 이산가족의 뻥 뚫린 가슴에는 북녘의 혈육을 향한 그리움이 오늘도 강되어 흐른다. 그래서 1천만 이산가족의 가족사는 한편의 감동적인 장편소설이요 전쟁드라마다.언론인 오도광(59)선배에게 95년은 대변혁의 해이다. 36년 10개월동안 몸담았던 한국일보사를 지난 2월말 정년퇴임한데다 4월26일에는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나라를 떠난 이민이 아니라 태어나서 59년동안 붙박혀 살던 서울 종로구 가회동36번지에서 경기 일산으로 난생 처음 이사를 간 것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정도 6백년행사를 하면서 본적 출생지 현주소가 모두 같을 수밖에 없는 그를 「서울 토박이」로 모셨다. 서울중에서도 종로토박이가 강남아파트바람등 숱한 사회의 변화속에서도 가회동 둥지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87년 작고하신 자당께서 당신 가슴속에 세워놓은 망부석 때문이다. 6·25때 졸지에 납북당한 남편이 지금이라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며 『여보, 나 돌아왔소』할 것만 같아 이사를 못간 것이다.
또 한편의 애절한 사부곡. 성우 김세원(50)씨의 부친은 「산유화」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월북작곡가 김순남 선생이다. 그는 국내외를 헤맨 끝에 부친의 육필악보, 사진 등 소중한 자료를 찾아냈고 수많은 사람을 통해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제는 빛바랜 사진속에만 계시다는 사실도 확인해야 했다. 김씨는 눈물겨운 사연들을 「나의 아버지 김순남」이란 책자로 묶어 최근 출간했다. 김씨는 88년 납·월북작가에 대해 해금조치가 내려졌을 때 『가슴에 박힌 못이 빠지는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통일이 되어 아버지의 악보를 찾아 북녘땅으로 여행할 날을 고대하고 있을지 모른다.<여론독자부장>여론독자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