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재개·정상회담 재추진 등/다른현안도 「이면논의」 가능성북한 쌀지원을 위한 남북 차관급회담의 합의가 21일 공식발표됨으로써 지난해 7월 김일성사망으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 이후 근1년만에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가 마련됐다.
이날까지 5일동안 계속된 베이징 회담은 지난해 6월28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접촉이후 처음으로 쌍방의 고위당국자가 간접적으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자리였다. 따라서 남북한이 이번 회담을 통해 쌀문제 이외의「이면논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나웅배 부총리는 『이번 회담은 쌀문제에 대해 논의가 집중됐다』고 이같은 가능성을 일단 부인하면서도 『그러나 다음달중 개최될 2차회담에서는 쌀문제 이외의 현안도 동포애적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운을 두었다. 더욱이 정부는 합의문을 발표하면서 7개항의 요지를 밝혔을 뿐 전문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이같은 제한된 발표형식 또한 남북간의 합의사항이라는 것이다.
서명주체문제를 제외한 쌀지원 구도는 이미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조선삼천리총회사간의 접촉에서 마무리됐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이석채 재경원차관과 전금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의 대좌에서는 쌀문제 이외의 남북현안들이 거론됐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단 쌍방 대표의 성격으로 볼 때 이면합의를 도출키 위한 「협상자」역할이었다기 보다는 최고당국자의 의사를 충실히 전달키 위한 「메신저」역할이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있다.
가장 관심있게 거론되고 있는 것은 남북정상회담의 재추진문제다. 정부는 이제 김정일이 올 하반기에 권력승계를 공식화할 것이라는 점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우리측은 이번 회담을 통해 권력승계절차이후 김정일을 북한최고당국자로 인정할 것이라는 점과, 남북화해차원에서 북한체제를 지원할 것이라는 점을 통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측은 이와 함께 정상회담이 지난해 북한 김용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 명의로 무기연기를 요청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북한측에서 재추진을 제의해주도록 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측은 이와 함께 북한측이 그동안 대화재개 거부이유로 내세워온 「조문문제」에 대한 입장을 전하고 이를 일단락하자는 뜻을 피력했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회담 진행중이던 19일 발간된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북한의 권력승계가 공식화되면 멀지않은 장래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 것도 관심을 끌만한 대목이다.
이같은 큰 메시지를 전하면서 우리측은 북한측에 대해 세부적인 지원방안 몇가지를 제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외신은 북한이 한국과 일본 이외의 국가로부터 식량을 수입하는데 대해 우리측이 지불보증하는 방안이 논의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북한의 외화난을 해소하기위해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등 국제금융기관에 북한이 가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등은 우리측에서 이미 준비해온 조치들이다.<유승우 기자>유승우>
◎남북합의 요지
①우리측은 북한측에 1차로 쌀 15만톤을 인도하며, 이 1차분은 전량 무상으로 제공한다.
②우리측은 본 합의서를 서명한 날로부터 10일이내에 첫 선박을 출항시킨다. 우리측은 상기 1차분을 해상을 통해 우리측 선박으로 청진, 나진항등에 인도한다.
③북한측에 1차분으로 인도되는 쌀은 정미 40㎏단위 PP포대로 포장하며, 일체 표기를 하지 않는다.
④본 합의서에 명시된 합의사항을 실행에 옮기는 쌍방 상사는 우리측에서는 대한무역진흥공사와 북한측에서는 조선삼천리총회사로 한다.
⑤남과 북은 쌀 인도·인수가 원만하게 이행되도록 필요한 모든 협조를 보장한다.
⑥남과 북은 1995년 7월중순에 제2차 회담을 개최한다.
⑦이 합의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본 대표단이 협의하여 해결한다.
였다.
◎「쌀타결」 청와대 입장/“상호신뢰 대화창구마련 성과”/정치차원보다 민간부문 교류확대 지원/장기적으로 북개방·체제변화유도 겨냥
청와대는 베이징에서의 대북쌀지원 합의가 궁극적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사실상 무상으로 쌀을 지원하고도 얻는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난해 7월 김일성사후 단절됐던 남북간의 대화가 재개됐다는 것만으로도 적지않은 성과라는 것이다. 사실 지난 3월 김영삼대통령이 유럽순방중 대북쌀제공을 제의했을때부터 우리 정부는 북한의 완강한 대화거부자세를 허문다는데 주안점을 두고 쌀제공에 있어서 아무런 정치적 조건을 달지 않았었다.
청와대는 특히 이번 쌀지원을 계기로 남북간에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대화의 창구」를 마련했다는 것을 수확으로 꼽고 있다. 김대통령은 취임이후 남북간 비밀접촉에 큰 비중을 두지않고 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대화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이후 몇차례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됐을때 우리 정부는 북한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는 창구의 필요성을 아쉬워했던게 사실이다.
때문에 이번 베이징회담에 앞서 북한으로부터 사조직 성격의 통로를 통해 비밀접촉을 제의받았을때 정부는 일부의 비판적 여론을 예상하면서도 이를 수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국자는 이와 관련, 『남북한이 서로 최고당국자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창구를 갖게 된 것은 앞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이나 한반도의 안정에 상당히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그러나 비공식적 사조직을 통한 대화는 문제가 있다는 판단아래 본격적인 쌀지원문제는 공식 창구로 변경할 것을 북한측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향후 남북관계에 있어 북한은 싫든 좋든 대화의 창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게 김대통령의 판단이다. 정치적 대화에 있어서는 북한이 앞으로도 거부의 자세로 나오겠지만 경제협력의 부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지원을 요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선 쌀문제만 하더라도 북한의 식량부족이 천재지변에 의한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성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북한의 식량문제는 생산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한 해가 갈수록 더욱 악화해 결국에는 우리측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이다.
비록 공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경제협력부분에 있어 상당한 교류가 진행중이라고 청와대측은 말하고 있다. 김대통령도 최근 들어 북한을 개방의 길로 끌어내려면 정치적인 대화보다는 민간부분의 활발한 대북투자가 중요하다고 보고 이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은 지난 14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게는 우리와 대화하는 길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며 『남북간의 경쟁은 분명히 끝났고 북한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밝혔다.
청와대는 우리측의 이같은 대북지원이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김정일체제를 공고히 해주는데 도움을 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북한의 개방과 체제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 김대통령도 여러차례에 걸쳐 『김정일이 공식지도자의 위치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언급해 왔다. 실제로 청와대는 금년내에 정상회담이 실현될 것으로 보고 벌써 관계부처와 대책마련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신재민 기자>신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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