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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평가(한일협정 체결 3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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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평가(한일협정 체결 30주년)

입력
1995.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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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워졌지만 아직 먼 이웃”/일 진정한 속죄·동반자의식 미흡 걸림돌22일로 한일 국교정상화조약이 조인된지 만 30년이 된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아직도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한 시대의 획은 그어졌다. 14년 1개월간의 줄다리기 협상끝에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체결된 한일조약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미완의 조약」일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나라」이고, 일제가 남긴 식민지 지배의 잔재와 전쟁책임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미래를 지향하는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과거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한일수교 30년을 되돌아 본다.<편집자 주>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지 30년이 지나면서 최근에 감지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국제정치·외교분야에서 양국간의 협력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핵문제등 한반도 안보상황을 둘러싼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양국의 정치적 신뢰관계는 급속히 다져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양국이 이런 단계에까지 이른 것은 경제·사회·문화면에서 상호협력및 의존관계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국교가 수립된 65년 2억달러에 불과하던 양국간 무역규모가 지난해 3백89억달러에 이르렀고, 인적교류도 65년 1만여명 수준에서 지난해에는 2백70만명에 육박했다.

한일 수교 30년에 즈음해서 양국간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보면 도래하는 아시아 태평양시대의 두 주역으로서 성숙한 동반자관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외무부 아주국 문봉주 심의관은 이러한 양국관계의 발전에 대해 『경제적 협력단계를 넘어서 지역및 통상문제, 국제안보, 유엔등의 다자간 무대에서 양국간 협력정도는 국제적인 상식을 초월할 정도』라면서 『특히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등 다자간 회의에서 양국은 서로의 이해를 조율, 공동대응하는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1당체제가 무너지면서 양국이 각기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점이 이러한 전향적인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은 일본정권의 잦은 교체에도 불구, 취임이후 일본총리와 5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국은 정통성 시비를 말끔히 떨쳐버리고 국제무대에서 당당한 자세로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다. 또 일본은 자민당이후의 연립정권이 나름대로 전후처리에 성의를 보이면서 국제무대에서의 제역할 찾기를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양국의 전환기적 모색이 최소한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이해관계의 일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환기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일관계의 근저에 깔린 앙금과 연관지어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외교안보연구원의 윤덕민 교수는 『미국을 매개로 했던 한일관계가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발전했고, 경제관계에서의 종속성도 많이 제거된 것이 사실이지만 국제무대에서의 일본의 정치적 진출이 반드시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특히 한일수교 30년과 동시에 제2차대전 패전 50주년을 계기로 일본이 어물쩡하게 전쟁책임의 면죄부를 얻기 바라고 있다면 우리는 더욱 경계해야한다는 인식도 싹트고있다. 일본이 내부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겪으면서도 중의원 통과에 그친 전후처리결의안이 미국과 유럽에서도 냉소적으로 평가되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바탕으로 진정한 사죄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나라」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일본이 우리와의 진정한 동반자관계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있다기보다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고려한 「수단」으로서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대북 쌀지원문제에서 나타나는 일본의 이중적 태도는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더욱 부채질하는 측면이 있다.<고태성 기자>

◎청산되지 않은 문제들/과거사 매듭 어물쩍 관계발전 저해/대일의존 심화로 무역 불균형 가속/감정의 골 깊어 문화교류 극히미미

▷과거사 사죄◁

한일관계는 전반적인 분야에서의 급속히 발전했지만 정치·외교적으로는 여전히 미묘한 부분이 남아있다. 가장 민감한 부분은 역시 과거사문제다. 일본은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진정한 사죄의 자세를 보인 것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문민정부이후 군대위안부문제등에서 보상 또는 배상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정당한 인식만을 촉구했으나 일본은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패전50주년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이만하면 됐다」는 인식과 함께 침략전쟁의 당위성를 강조하는 분위기마저 생겨나고 있다. 또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른바 「보통국가」를 표방하면서 자위대병력의 해외파병,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시도등 정치적 위상 제고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일본이 과거를 올바로 정리하지 않는한 우리가 일본의 안보리 진출에 손을 들어주기는 곤란하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한일관계와 남북관계의 함수다. 일본은 대북 경수로협상 타결 이후 북·일수교교섭 재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대북쌀지원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장기적으로 한반도 통일에 대비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외교적 대응과 함께 경계가 필요한 것이다. 일본은 현단계에서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희망하면서 남북관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려 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유승우 기자> ▷무역적자◁

한일 양국이 국교를 정상화한지 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양국의 가장 큰 경제현안은 심각한 무역불균형문제다. 65년 수교이후 우리나라는 단 한해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적자규모는 불어나 지난 4월말 공식 집계로 수교이후 지난 30년동안의 무역적자액은 9백95억8천8백만달러에 달했다. 올들어 월별 대일 무역적자규모가 15억달러를 넘어서는 점을 감안하면 수교 30주년을 맞기도 전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해 1천억달러이상의 엄청난 무역적자를 기록하게 될 것 같다. 수교 30년동안 우리나라 경제의 대일예속이 갈수록 심화돼왔다는 뜻이다.

이같은 대일 무역적자액은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전체 무역적자액 5백50억달러의 2배를 넘는 규모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의 교역에서 벌어들인 돈을 모두 일본에 쏟아붓고도 모자라 쌈짓돈을 꺼내 준 셈이다.

이는 우리 경제구조가 지나치게 일본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상품의 구조를 보면 원자재가 32%를 차지하고 자본재가 62%에 달한다. 전체 수입의 94%가량이 산업구조상 불가피하게 수입되는 기계류 부품 소재다. 일본상품의 수입을 견제하기 위한 수입선다변화품목제도등이 실시되고 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엔고이후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무역수지 적자폭을 줄일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으나 높은 대일의존도가 우리나라 무역수지 개선의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늘어나는 대일적자를 줄이지 않고는 무역수지 흑자는 물론 우리 경제의 자립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이종재 기자>

▷문화교류◁

한·일 문화교류는 30년 수교역사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미미하다.

한일협정 체결직후인 65년 12월부터 문화재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이 발효됐지만 80년대 후반까지 교류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교류분야도 전통문화가 대부분이었다.

물꼬가 트인 것은 90년대 이후. 92년 6월 한국문화통신사의 일본공연을 계기로 한동안 일본 연극·무용등이 한국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5월 일본 고지야마 만스케 극단이 부산 대구등에서 공연한데 이어 9월에는 일본극단 「사키」 국립극장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한국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올해초 미국적의 왜색영화 「가정교사」와 「쇼군 마에다」의 국내 상영, 한국계 일본여가수 미야코 하루미의 국내공연계획 불허등 악재가 겹쳐 교류에는 다시 찬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들어올 것은 다 들어와 있는데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불통상태이다.

일본은 한국문화 전면개방의 원칙아래 문을 열고 있으나 정작 한국문화의 진출은 드물며 한국은 뿌리깊은 일본문화에 대한 거부감에서 빗장을 걸어놓고 있다. 83년 12월 열린 제1회 한일문화교류 실무자회의에서 일본이 대중문화 개방문제를 공식제기한 이후 국내에서는 10여년째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박천호 기자>

◎30년전 그때… 이동원 당시 외무 회고/「매국」 비난·죽음위험 불구/소신따라 조인위해 일로

한일 국교정상화는 정권의 존립을 위협하는 국민적 저항속에서 이루어졌다.야당과 학생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외무부에서 조차도 찬반양론이 있을 정도 였다. 갓 출범한 군사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발판이 필요했고, 한일수교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싶어 했으나 국민감정은 수교협상을 매국외교로 드세게 몰아 부쳤다.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이동원(69·국제학술원원장)씨는 『「제2의 이완용」이라고 매도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이겠다는 협박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적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나야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확신범 이었으니까 그 일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었지만 어린 아들을 유괴해 죽이겠다는 협박전화를 받았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정식 수교 3년여 전인 62년 11월에 작성된 김­오히라 메모(김종필 당시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대평정방) 일본외무장관이 주고받은 비밀각서로, 청구권 액수등 수교협상의 핵심쟁점에 대한 합의가 기록돼 있음)가 촉발시킨 한일회담반대움직임은 64년의 6·3사태를 거치며 곧바로 정권퇴진 요구로 이어졌다.

학생과 야당및 재야세력이 주축이된 회담반대세력은 비밀각서가 오가는 한일회담을 굴욕외교이자 매국외교라고 주장했다. 우리국민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에다가 수교를 서두르는 군사정권의 움직임이 국민의 눈에 곱게 비칠리가 없었다.

이전장관은 65년 6월20일 협정에 조인하기위해 일본에 갈때 역시 데모대에 시달려야했다. 야당의원들과 학생들이 아예 공항을 점거하고 있었고, 김포공항으로 가는 연도에는 시위대가 넘쳤다.

『공항에 나와계시던 어머니가 내손을 붙잡고 우시더군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매국노니 이완용이니 하는소리를 듣느냐」고 하신 뒤 「그까짓 감투 버리고 일본에 가지마라」면서 나를 놔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나는 「제가 그런놈이 아니라는 것은 어머니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무엇때문에 제가 매국·역적행위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 부끄럽지 않으니 절 믿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뒤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겨우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보니 옷에 시위대가 던진 달걀이 깨져 묻어 있더군요. 일부러 옷을 바꿔입지 않고 그대로 일본에 내렸습니다. 우리국민의 반대가 이 정도 라는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지요』

이 전장관은 『수교회담이 처음부터 외무부를 공식창구로 해서 공개리에 진행되었다면 상황이 좀더 나았을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수교에 반대하는 정서는 우리 뿐만 아니라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당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일본 좌익과 조총련의 반대는 결사적이었다. 이전장관은 『65년 3월 일본을 공식방문하기위해 하네다공항에 내렸을 때 죽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미국에 먼저 들러 일본으로 갔는데 미국에 있을 때 일본의 수교 반대세력이 자신을 하네다 공항에서 암살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일본 도착을 일본의 6대 TV방송이 생중계 하는 것을 보고 만약 암살을 당하면 어떻게 죽어야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줄까를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 때 수교를 하지 않았다면 한일 국교정상화는 최소한 10년 이상 늦어 졌을 겁니다. 당시의 수교헙상이 최선의 것이었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겠지요. 특히 정신대문제등의 전후책임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언론도 그랬고 수교 반대론자들도 그랬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교에는 항상 상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간의 조약은 명백한 불평등조약이 아닌한 이를 어떻게 지키고 적용해 나가느냐가 중요합니다』 39세 약관으로 회담의 주역을 맡았던 이전장관의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총평이다.<이병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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