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통사태 종교계 일방이해요구 아쉬움최근 일본의 한 전직 각료의 망언이 한국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에 보도되어 국민의 노여움을 샀다. 늙어서 이제는 별 쓸모가 없어진 자신을 가미가제식으로 던져 조국을 위한 희생물로 삼으려는 왜곡된 애국심의 발로였을까, 아니면 진정으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시혜」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동아전쟁을 「서구제국주의에서 아시아를 해방시킨 위대한 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에게 얼마전 한국을 다녀간 반제국주의 문화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렇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영국군이 철수한 후에도 현지에 계속 남아 또 다른 제국으로 군림했었는가』
사이드에 의하면 그러한 핑계는 모든 제국주의자의 전형적인 억지논리일뿐이다. 그는 영국과 프랑스 역시 일본처럼, 아프리카 대륙을 암흑과 무지에서 해방시켰다는 핑계로 자신들의 식민주의를 미화시켰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미국은 서구인 독일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원자탄을 동양인 일본에는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일본인들을 하루아침에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일본인들은 아직도 스스로를 전범이 아닌 피해자로 생각하며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를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다. 결국 일본은 스스로의 협소한 그릇으로 인해 현재도 앞으로도 세계를 지도하는 나라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독일과는 너무나 다른 그들의 태도를 보며 같은 동양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일부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의 망언에 우리가 귀기울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일보의 집중적인 보도는 유익했고 또 시의적절했다고 느껴졌다.
국내에서는 요즘 선거열기가 한창이다. 처음 실시되는 지자제선거여서 일간지들도 연일 머리기사로 선거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국민은 『시장후보들 외에는 도대체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선거열기는 국민 사이에서 보다는 출마자들과 언론사간에 더 뜨거운 것처럼 보인다.
한국일보만큼은 그러한 열기에 휩싸이지 않고 선거의 부작용을 감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주기를 독자들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선거를 의식해서였든지, 당국은 종교적인 성역속에 은신해있던 한국통신 노조지도자들을 연행해서라도 사태를 빨리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상외로 거센 종교계의 반발이었고, 그것은 선거를 눈 앞에 둔 집권여당의 당혹으로 이어졌다.
전통적으로 존중되어온 종교적인 도피처를 공권력의 힘으로 훼손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성역이 없는 수사나 사정」은 그동안 주로 면책특권을 누려왔던 고위층을 겨냥한 말이었지, 종교적인 도피처의 훼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도피자들이 살인범들도 아닌 노동운동 관련자들이었기 때문에 명분이나 모양새가 더욱 좋지 않았다. 물론 화해는 필요하다. 그러나 화해란, 잘못한 측의 사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피해자측의 이해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들은 피해자측의 일방적 이해만을 요구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번 주 한국일보에서 특이하게 보였던 지면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부각시켜주었던 「신세대광장」과 멀티미디어를 다루었던 「뉴미디어」였다. 그와같은 독특하고도 필요한 지면들의 개발을 통해 한국일보는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감각의 신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서울대교수·영문학>서울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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