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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미학소설추구/한국「순수문학」의 거목/김동리씨 작품과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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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없이 미학소설추구/한국「순수문학」의 거목/김동리씨 작품과 일대기

입력
1995.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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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도」·「황토기」·「등신불」 등 대표작/참여문학과 논쟁땐 항상 선봉에 서17일 타계한 김동리씨는 60여년간의 문학활동을 통해 「순수문학」의 텃밭을 일궈낸 거목이자 한국현대문학사의 산 증인이다. 다양한 장르에 걸쳐 인간주의와 샤머니즘으로 설명되는 「미학소설」의 흐름을 일관해서 견지했고 「본격문학」 「제3세계 문학」등으로 스스로 이름붙인 「순수문학」의 이념적 입장에 따라 우리 문단의 기틀을 세웠다.

그는 한학자 고 범부 김기봉(범부) 선생을 장형으로 두고 대구 계명중학을 거쳐 서울 경신고보(현 경신고)에서 수학했다. 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입선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했으나 35, 36년 「화랑의 후예」 「산화」 등 두 편의 소설이 연이어 조선중앙,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소설에 주력하게 됐다.

그의 문학적 편력은 대략 3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등단 후부터 해방까지로 「화랑의 후예」, 「무녀도」「바위」(36년) 「황토기」(39년)등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토속적 색채와 샤머니즘, 운명론을 토대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다. 특히 「무녀도」에서는 신의 문제와 민족의식을 강렬하게 형상화했다.

5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관심은 초월적 세계로부터 일시적으로 인간과 현실의 문제로 기울어진다. 「귀환장정」(51년), 「흥남철수」 「밀다원시대」(55년)등과 전쟁 이후 허물어진 인간의 삶이 담긴 「실존무」(55년)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하지만 「신과 인간과 민족의 문제」는 그 모습을 감추지 않고 장편 「사반의 십자가」(57년)에서 쉼없이 추구되었다. 후기작품인 「등신불」(61년) 「까치소리」(73년)등에서는 불교적 세계관과 결합하기도 했다.

39년 유진오씨에 맞선 순수·참여논쟁, 46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그 회장을 맡으면서 좌파문인들과 대결한 논쟁, 48년 평론가 김동석씨와 「문학의 기능」을 놓고 벌인 논쟁, 78년 창비계열 문학인을 비판한 사사 논쟁등 참여문학과의 대결에서 그는 항상 맨 앞에 섰다.

그는 「월간문학」 「한국문학」 「현대문학」등을 통해 박경리강신재 장용학 이범선 한말숙 손장순 정을병 이문구씨등 수많은 작가를 탄생시킨 산파였다. 강단에서도 53년부터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예대)교수로 재직하며 천승세 김원일 유현종 오인문 오정희 이근배씨등을 길러냈다. 소설가협회장(79년) 예술원 회장(81년), 문협이사장(70년, 83년)을 역임했으며 85년엔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김범수 기자>

◎김동리 추모문/미당 서정주

김동리가 우리의 이승을 떠나다니? 아무래도 이 기별이 잘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욕심꾸러기 중에서도 둘째가 되라면 단호히 거부했을 이 큰 욕심꾸러기가 이렇게 눈깜짝 사이에 저승으로 옮겨가다니? 나는 아직도 내 듣는 귀를 의심할 따름이다. 의식불명의 뇌사자가 되어서도 5년간이나 식물인간으로서까지 버티어온 그가 마침내는 이렇게 떠나가다니? 참 서글픈 일이다. 그의 넋이 가는 길에 명복이 있기만을 빌 따름이다. 더구나 나는 그의 큰 아들과 셋째아들 둘의 결혼주례까지도 맡아 했던 사이인지라 그의 죽음은 남의 일같이 생각이 되지 않는다.

1935년 여름, 그가 이 해의 조선중앙일보 신춘현상소설에 「화랑의 후예」로서 당선하고 상경하여 동숭동에서 「무녀도」라는 단편을 집필하고 지냈었을 때의 일이 지금 당장의 일처럼 기억에 새롭다. 이때의 어느 날 밤 그와 나는 하던 이야기가 길어져서 한 방에서 같이 잠이 들었었는데, 첫 새벽에 내가 잠이 깨어서 보니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방안에는 보이지 않더니, 날이 희부옇게 밝아올 무렵에야 다시 내 앞에 나타났었다. 『어디를 갔다가 왔나?』 내가 물었더니 『산에 좀 갔다가 왔다. 깊이 뭘 좀 생각해 볼 게 있어서…』하는 것이었다. 김동리와 그의 문학정신을 이해하는데는 이 이야기가 아조 필요할 것같아 기억에 떠오르는대로 이걸 먼저 여기 적어 둔다.

김동리의 「휴머니즘」과 철저한 「반공정신」 ―이것은 1945년의 해방 이후의 우리나라 문학을 회고해 볼때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의 하나가 된다. 그의 그 「휴머니즘」이라는 것만을 단독으로 떼놓고 생각해 보기라면 그야 재고해야 할 점도 없지 않겠지만 이 「인간성의 자유」와 결합시킨 「반공정신」의 치열한 그의 주장들은 대한민국사람인 우리들에게는 큰 고무가 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의 그 공적을 그의 떠나는 넋앞에서 거듭 찬양해둔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는 또한 시인으로서, 1936년에 창간한 「시인부락」의 창간동인이 되어 좋은 시들을 발표해 보여주기도 했었다. 나는 이 시인부락 창간의 편집 겸 발행인이었던 신분으로서도 가장 깊은 애도의 뜻을 이 자리에서 표명해두지 않을 수 없다.

1934년 봄이었다. 내가 서울안암동의 개운사대원암이라는 곳의 조선불교중앙강원에서 박한영 대종사로부터 불경강의를 받고 있었을 땐데, 어느 날 새로 사귀어 알게 된 김동리가 찾아와서 하룻밤을 내 방에 같이 묵으며 긴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었다. 이튿날 오전에 그가 떠날 때 나는 전송을 해 따라 나가다가 『전차를 타고 가라』고 그 전차운임 5전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었는데 그는 몇 걸음 걸어가다가는 나를 휙 돌아보며 그 5전짜리 동전을 보기좋게 나를 향해 내던져 되돌려 주고는 쏜살같이 달아나버렸다. 그는 그때 양복바지도 없어, 그의 형수가 한복바지를 줄여준 것을 입고 있었으니, 그의 형님이 살고 있던 그 먼 필운동까지 아마 터벅터벅 걸어서 갔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알아 잘 기억하고 있는 김동리다.

동리야! 저승에서 부디 잘 지내다가 또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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