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틈에 넘치는 창조적 가능성을 모색한다/경쟁과 급변의 물결 뒤범벅 여유없이 주눅든 삶에도/제주 환경·자치운동 열정보며 창조적 가능성 틈 발견요즈음은 그렇지도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을 처음 만나 수인사하는 중에 꼭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해외엔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유학이거나 연수차, 회의차거나 아니면 관광이거나 간에 의당 다녀왔겠거니 하고 묻는 말투다. 내 대답은 항상 똑같다.
『네. 제주에 좀 다녀왔습니다』
열에 열은 다 놀란다.
『아니 제주가 무슨…』
그렇다. 제주가 무슨 해외일까 보냐. 눈 달리고 코 달린 사람은 모두들 해외나들이를 하는 세상, 뿔퉁스럽게 제주를 들먹이는게 뭐 그리 잘난 짓일까 보냐.
아득한 옛 일이다. 대학시절. 그때 친구들 몇이 술에 취해 기타를 치며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 기억난다.
머나먼 아메리카로
떠나가고 싶네에
그랬다. 모두들 미국으로, 프랑스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곤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1백년 전 갑오동학혁명이 좌절된 뒤로부터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럴 형편도 아니었지만 그럴 생각조차도 없었다. 왜 유학을 가지 않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나는 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내 국토도 아직 다 밟아보지 못했다』
대학시절 내가 호감을 갖고 있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무척 똑똑한 친구였는데 어느 날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이 더러운 나라 떠나고 싶어. 거지가 되더라도 구라파에 가 살겠어』
이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뒤 내 마음이 그녀에게서 차츰 멀어졌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단지 지금 내가 그리 살고 있진 못하지만 붙박이 삶이 좋고 토박이삶을 그리워한다. 사람의 이동거리가 멀고 활동공간이 넓어지면 삶의 시간은 빨라진다. 그 대신 공간이 좁아지면 시간은 느려진다. 채송화, 봉숭아, 참새, 종다리, 돌멩이 하나에까지 관심은 촘촘해지지만 오히려 마음은 한적하고 틈이 넓게 벌어지는 법이다. 비록 이른 나이에 부표하여 내내 객지생활을 해왔지만 내 마음은 항상 고향집 뜨락의 붉은 맨드라미와 뒷산 기슭의 황금빛 보리물결, 시커먼 뻘땅 너머 푸른 영산강에 뛰어오르는 빛나는 숭어떼들에 가 머무르곤 했다. 언젠가는 돌아가겠다. 돌아가 볕 드는 토방마루에 나앉아 꽃마리 까고 이나 잡겠다. 이런 생각이 그 황량했던 나의 삶을 간신히 버텨주었던 것이고 그 한적하고 느긋한 틈을 지키고 확보하기 위해 나는 싸운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진보적인 나의 친구들은 노상 나를 「에세이닌」이니 「마프노」니 농본주의자니 복고주의자니 하고 비웃었던 것이다.
해외에 나갔던 친구들이 속속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빈틈없고 눈빛 번쩍이는 재빠른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양에서 속도를 가져왔고 이 사회에 그 속도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세상은 무섭도록 변하기 시작했으며 그 빠른 시간은 곧 빈틈없고 재빠른 사람들의 시간, 나같이 엉성하고 느린 자들은 차츰 처져서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경제학이라는 이름의 극도로 정밀한 숫자를 들이대며 경제발전을 내세우는 데야 할 말이 없었고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가차없는 혁명의 논리를 쳐들어 눈에 핏발을 세우고 산업노동자 중심의 빈틈없는 강철의 대오를 소리높이 외쳐대는 데는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극도로 세련된 프랑스의 문화이론에 주눅이 들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정보사회이론에 그만 기가 질려버렸다. 돌아갈 고향은 사라져 버렸고 한적한 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모두 다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 세계는 그렇게 생성 변화하고 있으니 현실로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사회는 살인적인 경쟁과 변화로 뒤범벅이며 자연파괴는 극도에 이르고 숱한 자동기계에 둘러싸인 인간은 서서히 주체를 상실해 가는 이 세상이 그야말로 역사적 필연이요 진보인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문제는 시공관에 있는 것같았다.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과거에서 미래로 가속적으로 진행하는 비가역적인 것일 뿐인가? 공간은 빈틈없이 가득찬 죽은 물건들과 구조물들의 체계적 세계, 이른바 환경일 뿐인가?
명절때마다 필사적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수천만의 민족대이동을 보며, 휴가철과 주말이면 산과 숲과 냇물과 바다로 미친 듯이 몰려가는 도시인들을 보며, 조그마한 틈만 나면 그 틈에 퍼질러 앉아 가상적인 느긋함을 애써 누리려 하는 숱한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실존적인 삶의 시간은 오히려 가역적이기도 하고 삶의 공간은 본디 수많은 틈이 있어 그 틈에서 새로운 차원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그래 틈이 많은 한적한 인간적 삶의 회복과 비록 옛 고향의 모습은 찾을 수 없으나 버려진 틈인 지역에 내 자신과 모두가 내심에서 바라는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새 사회를 창조하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생명과 자치」운동이다.
요즈음 밀란 쿤데라의 「느림」이 대유행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비가역적·가속적 속도사회인 서구의 한 복판에서 저속과 가역의 반란, 틈의 문화폭탄이 터진 것이다.
요즈음 네트워크 즉 그물망이라는 말이 대유행이며 지방화가 전세계적인 추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빈틈없이 꽉 들어찬 것처럼 보이는 세계가 사실은 수많은 틈을 가진 그물같은 것이고 그 틈이 바로 버려진 지역이며 바로 이 주변부의 틈에서 새시대의 새로운 세계적 삶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생명과 세계는 본디 이중적이다. 개인이면서 사회에 속하고 세계에 속하면서도 민족과 지방에 동시에 속하는 이 이중성은 자고로 안정과 변화를 동시에 요구해 왔으며 지금은 개발과 환경을 함께 요청하는 민중의 마음의 실상이요 생명의 본성이다. 그러매 전통과 첨단을, 고속과 저속을, 비가역이면서 가역을, 빈 틈 없음과 빈 틈 있음을, 세계화와 지방화를, 정보화와 창조화를 상호투쟁이 아니라 마치 음양처럼 상호보완적인 상생과 균형관계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데에 내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문제는 어느 쪽에 중심을 두느냐이다. 살아 있는 균형은 언제나 「기우뚱한 균형」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중심은 서서히 이동하기 때문에.
나는 이제껏 골방에 틀어앉아 똑 토산뿌리마냥 나만의 틈을 지키려 했다. 외국에서의 숱한 초청을 마다했고 나를 위해 애써 준 일본친구들을 찾아 인사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어 왔으며 최근엔 프랑스정부의 초청도 일언지하에 사양해 버렸다. 해외유학파들을 흰 눈을 뜨고 쳐다 봤으며 신세대를 깊이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내가 이미 생명과 자치에 중심을 둔 이상, 저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어이 어이 불러 얘기를 나누고 기회 닿는대로 해외에도 나가볼 생각을 한다. 장족의 발전일까? 이순이 가까워서일까?
애당초 제주얘기부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제주에 간 것은 1973년 겨울. 그때 나는 이듬해 봄에 있을 대규모 반유신운동의 조직에 몰두하고 있었고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감옥과 죽음 이전에 그토록 보고 싶던 제주땅을 한 번만 밟아보고 싶었다. 자그마한 프로펠러 추진기에서 내려다 본 제주는 마치 원시의 정원이었다. 새푸른 하늘, 한라산의 흰 눈, 샛노란 밀감, 새빨간 동백꽃, 검은 돌들, 그리고 초록빛의 바다, 불길한 예감에 쫓기던 내게 그것은 심호흡을 할 수 있는 거대한 틈이었다. 모슬의 그 투명한 바닷물, 서해안의 황량한 아름다움, 성산의 밤 검은 절벽 저쪽으로 무수한 인광이 명멸하는 신비한 바다. 그리고 외돌괴와 밤섬과 옛 서귀포구의 덩쿨수렁과 돛배들, 돌담 너머 초가집 뒤꼍에 쌓인 농기구며 살림살이, 건초더미에서 흘러나오는 정다운 옛 생활의 냄새.
7년동안 겨울이면 하얗게 얼음꽃이 뒤덮이는 그 추운 독감방에서 나는 잃어버린 연인의 얼굴처럼 제주의 찬란한 겨울을 떠올리며 그 추억으로 견디었다.
다시 찾은 것은 1986년 여름. 완도에서 배편으로 갔다. 제주항을 바라보던 내 눈을 한라산의 스카이라인을 싹둑 잘라버린 멋대가리없는 칼빌딩이 쑤시고 들어왔고 서귀의 외돌괴 절벽 위에 우뚝 선 컨테이너같은 호텔건물을 보고 그만 낙담해 버렸다. 제주는 내게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1993년 겨울과 1994년 가을에 다시 갔을 때 아직도 훼손되지 않은 중산간의 오름들, 기이한 느낌의 산굼부리, 원시의 비자림, 흐드러진 갈대밭, 한라산의 단풍진 숲들을 보며 내 마음 속 제주의 틈이 다시 석류처럼 벌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며칠 전 제주에 다녀왔다. 제주의 환경과 자치운동단체인 「푸른 이어도의 사람들」의 초청강연이었다. 이어도, 이어도, 푸른 이어도!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소리 하지 마라
이어도 하면 눈물 난다
대학때 들은 이 이어도민요에서, 그리고 그 기이한 전설에서 죽음과 파멸을 무릅쓰고 이어도, 그 꿈 속의 푸른 낙원을 향해 끝없이 노저어 가는 제주사람들의 거친 삶 속에 움직이는 신비한 매혹과 전율을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보았으며 언젠가는 칠보로 가득 찬 영롱한 이어도가 바다 위에 불쑥 솟아 오르는 이상한 꿈을 꾼 일도 있다.
만나 헤어질 때까지 내가 관찰한 그들은 당당한 그 사투리, 가난하나 헌신적인 운동에의 정열, 소박하고 따뜻한 건강한 정신과 다함없는 향토에의 사랑. 그래, 그들이 바로 그들 자신이 찾는 이어도요 제주를 지키고 창조할 새 가능성으로 가득찬 틈이었다. 그날 흐린 하늘, 가득찬 구름으로 한라산도 푸른 숲, 초록바다도 볼 수 없었다. 내가 본 것은 사람 속의 이어도, 참으로 큰 틈이었다. 그러매 제주기행이 내겐 곧 해외유학인 셈이다.
나는 강연 말미에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제주가 아직도 온존하고 있는 옛 인심과 농업기반과 생태계를 필사적으로 지킬 것, 그리고 그것을 가치기준으로 해서만 개발하도록 간섭할 것, 둘째는 그것을 조건과 바탕으로 해서 역으로 최첨단의 「동북아시아 사이버 소프트 컨셉터」(인공지능 소프트에 대한 창조적 발상지원 시스템) 및 그것에 연결되는 다양한 코디네이션 시설과 부대시설들을 건설하는 장기적 계획을 구상할 것.
미국의 지성들이 걱정하듯 시뮬레이션 시스템 자체가 곧 병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정신과 내용의 취약성이 문제라는 것. 만약 건강한 생태적 영성과 유불선의 동양사상, 특히 불교의 여래장원리를 중심으로 그것을 다룬다면 그것은 오히려 엄청난 창조적 기능으로 바뀐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 공학적 기술쪽이 아니라 그 내용과 바탕인 깊은 우주적 영성의 창조력쪽에 중점을 두는 「기우뚱함」을 지키는 것이라는 그런저런 얘기들이었다.
돌아오는 길의 저 캄캄한 밤바다 상공에서 생각했다. 이순이란 결국 이중성, 다중성등의 무질서한 역설과 불확실한 우주생명의 소란한 물결소리에 대해 마음의 틈이 크게 부드럽게 열리는 것은 아닐까?
아하! 그 사이 세월 많이 흘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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