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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교섭의 원칙/박상섭(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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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교섭의 원칙/박상섭(한국논단)

입력
1995.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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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드디어 잡힌 듯이 보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북한의 태도는 언제든지 돌변할 수 있는 까닭에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제네바회담에서의 애매한 합의문에 비하면 약속사항들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은 북핵문제의 해결전망은 밝아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경수로건설의 실질적 작업과 관련하여 남북한의 직접 대화가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다시 여러번의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문제 자체가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님을 명심해 두어야 할 것이다.이러한 몇가지 유보사항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북·미간 합의의 도달을 일단 희망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당사국들 모두가 소득을 올렸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경수로 건설비용 30억달러는 북한의 「생떼」를 이기지 못해 지불하는 「생돈」처럼 여겨져 좀 어처구니 없는 기분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고 따라서 그 주장은 부족했던 우리의 대북교섭력을 애써 감추려는 둔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번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북·미간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보인 일관된 자세가 북한의 양보를 끌어내는데 일역을 담당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이번의 작은 「성공」에 자만한다는 것은 금물이겠지만 이번을 계기로 지난 수년간의 험난했던 대북협상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대북교섭의 전략적 원칙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분명히 있을 새 고비에 부딪쳐 좌절감에 사로잡히기에 앞서 치밀한 전략적 사고를 갖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다음과 같은 원론적 논의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원론적 논의는 지난 수백년에 걸친 근대국가간의 외교관계의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 점은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를 통해 배워 익히 잘 알면서도 현실에 부딪쳐서는 쉽게 망각하는 듯 한데 아마도 짧은 외교경험 밖에 없는데다 민족간의 대결이라는 특수성을 갖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무력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국가간의 관계에서는 어떤 한쪽에서 보여주는 호의나 선의는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스스로 약하다는 점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어차피 국가관계에서는 상대의 호의나 선의를 기대하지 않도록 훈련되고 있다. 물론 호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악의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일반적으로 무장대립하는 국가간의 관계에서 전쟁은 분노나 단순한 욕심 때문 보다는 확실한 승산의 전망이 설 때 더 많이 일어난다. 따라서 취약성의 표시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선의의 표시는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남북한이 기본적으로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러한 원리의 적용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정말로 민족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남북한 사이에는 전쟁이 애초부터 없었어야 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민족간의 전쟁보다 동족간의 분쟁이 더 치열했다는 점도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굳이 강조하는 것은 의도면에서 숭고한 행위가 결과에 있어서는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싸울 준비를 하라는 역설같은 역사의 교훈은 단순히 수사를 위한 역설이 아니라 역설적인 정치현실에 대한 정직한 서술일 뿐이다. 최고의 선을 추구하다가 순교를 감내하는 개인의 행위는 숭고하지만 순교적 결과를 예상에 넣는 정치행위는 무책임한 행위일뿐이다.

국가간 외교관계에서는 이미 제공된 서비스에 대해 사후에 값이 치러지는 법이 없다. 지난 몇년간 대북교섭과정에서 값이 치러지기를 기대하면서 몇번 먼저 서비스가 제공된 적이 있다. 부족한 경험 때문에 그랬다 해도 한번으로 족한 실수이다. 동족간의 관계에서 이러한 냉정한 주장을 펴는 일이 대단히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북한이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온 적은 있어도 동정을 베풀기를 요구한 일이 없다는 점에 대해 잘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적지만 그러한 원조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가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탕으로 그 요구에 응하면 될 것이다. 일체의 미움, 악의, 감상 또는 연민이 배제된 객관적 사태에 대한 객관적 대응태세가 대북교섭에서 가져야 될 우리의 기본자세로 여겨진다.<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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