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의 시집 「소읍에 대한 보고」는 제목 그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읍의 삶에 대한 희망없는 관찰, 줄기를 이루지 못하는 잡다한 생각들과 사건에 이르지 못하는 사건들에 대한 기록, 시인 자신의 병고에 대한 긴 이력, 이런 것들을 전하는 어두운 말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암울함이 시집을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힘을 발휘하고, 때로는 옻칠한 밥상처럼 검은 광채로 번들거리니 놀라운 일이다.소읍은 「다리」를 건너야 나온다. 한 젊은이가 자의식 없이는 통과할 수 없는 다리인데, 썩은 하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일단 건너가면 그의 삶이 「세월을 먼지에 내주며 허물어져 가는」 평화 속에 묻힌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밥을 먹는다」. 어떤 여자는 「언제나 느릿느릿 밥상을 차려」 혼자 「늘 울면서 밥을 먹는다」. 재빠른 사람들이 일찍 한탕을 치고 떠난 이 주눅든 세계에서는 누가 누구를 충고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 소읍에서 또는 그보다 훨씬 큰 도시에서, 젊은이는 정신을 맑게 가지려고 애쓰나 「기껏 혼돈과 찌꺼기를 담고 있는 세숫대야에 담긴 물의, 수면의 고요」에 만족해야 한다.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을 사건으로 해석해야 할 여력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없다. 이를테면, 「감포 가는 길?」에서 우리가 그 이름을 익히 아는 시인 몇 사람이 「차축이 굽은」 차를 타고 가다 「천당에 갔다」 오는 사고를 당했을 때도, 라면을 끓여 먹고 「세 시까지 고스톱을」 치고 「담배를 피워대며 음담패설을」 즐기는 것으로 사건이 끝난다.
이 모든 불행에는 특징이 있다. 시인 자신의 신부전증이 그렇듯, 한결같이 만성이라는 점이다.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이 가르쳐 주는 바, 이 만성적인 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흐트리고 집중력을 흔적없이 기화시킨다. 재능과 정열은 단지 범속해질 뿐이며, 한 천재에게는 인내하는 일이 남는다. 인내라는 말은 너무 크다. 단지 견디되 「기교적으로」 견뎌야 한다.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어떤 꿈도 꾸지 말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시인은 우리를 「위안」하기 위해 이 시들을 썼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그 거품을 걷어내고 나면 거기 남는 것은 사실 저 소읍의 삶뿐이기에 우리는 위안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 위안의 내용이라면, 아마 인간이 어느 처지에 들어도 지적될 수 있다는 것이 될 것같다. 운명은 비록 밖에서 주어져도, 인간은 그것을 「기교적으로」, 자기 책임으로 떠맡는다. 그것은 도통이 아니다.<황현산 문학평론가·고려대교수>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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