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국민의 정치에 대한 복잡하고 상충하는 견해와 정서를 카타르시스하는 기능을 갖는다지만, 선거에 대한 나의 옛날 기억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국민학교 고학년에 접어든 60년대 초, 방과 후 운동장에 남아 국회의원 후보자 합동유세를 본 적이 있다. 찬조연설자까지 합쳐 열대여섯 명의 정견발표를 듣다 보면 어느덧 운동장에는 땅거미가 졌다. 볼 것, 들을 것이 시원찮던 시골에서 흔치 않은 정치체험이었다.
유세 며칠 뒤 이런 식의 말들이 떠돌았다. 『말 잘 하는 김○○』『또 나왔다 ○○○』 『먹고보자 ○○○』『찍고보자 ○○○』…. 열변이 인상적이어서 호감이 가던 후보 앞에 붙은 「말 잘 하는」이란 말에는 「말만 잘 하는」이라는 비아냥이 가시처럼 들어 있었고, 「먹고보자」라는 저차원의 말은 그 후보가 커다란 염전을 소유한 부자였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 기대를 저버린 이런 음습한 평가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인지, 누군가의 여론조작에 의해 밀실에서 나온 것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말들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후보자를 끈질기게 따라다녀 결과에 영향을 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많은 남자들이 그랬겠지만, 나의 첫투표는 군에서 이루어졌다.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였는데, 『말해도 좋다』고 해서 공개리에 말한 이 훈련병의 정치적 견해는 상관들의 뜻과 맞지 않았는 지 투표일을 전후로 해서 몇번을 불려다녀야 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아 떠나가던 날, 선임하사는 걱정스러운 듯이 『어딜 가더라도 군대생활 잘 하라』면서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지난달 14일 지역민방이 출범한 후 KBS MBC등 중앙 방송사와 그 지방계열사, 지역민방등이 앞다퉈 후보자들을 토론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이제까지는 대개 포스터로 보아야 했던 후보자들의 얼굴과 경력, 철학과 소신, 정책대안등을 안방에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TV를 통해 조용하지만 커다란 선거개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일보가 고려대 신문방송연구소, 미디어 리서치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수의 유권자들이 「20∼30대 표의 향방이 이번 지방선거를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본보 6월 9일자 1면 보도). 나의 어릴적 실망과 첫투표의 좌절을 넘어, 이 젊은 세대가 TV토론회를 통해 객관적 정보를 얻고 자유로운 투표를 거쳐 새로운 미래를 맞게 되리라는 점이 기쁘다.<문화2부장>문화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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