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출신등 “우리텃밭 위협” 우려 경계심/일반 조선족도 “한국인 너무 거들먹” 불만베이징(북경)특파원으로 정식부임하기 직전인 92년 11월, 베이징의 한 한국식당에서 조선족 복무원(종업원)아가씨에게 말 한마디 잘 못 건넸다가 잠시 어색한 상황에 맞닥뜨린적이 있다. 서툰 중국말로 운을 떼니 돌아온 대답은 우리말. 반가운 마음에 같이 간 동료를 돌아보며 『이 아가씨 한국사람이네』했더니 그 조선족 아가씨는 대뜸 정색을 하며 또랑또랑한 우리말로 『아니에요, 중국사람입니다』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말을 잘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동포」라는 뜻으로 한 「한국사람」이란 표현을 바로 그자리에서 면박주듯 교정하는 동포아가씨의 태도에 당혹스러운 한편으로 서운하기까지 했다.
중국에는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우리동포가 3개 국적으로 나뉘어 있다. 한국인, 조선인(북한인), 중국국적의 조선족등이다. 처지는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나름의 강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국특파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초기 이들 3각 관계는 오랜만에 떨어져 있다 만난 친척처럼 좋게만 보였다. 하지만 3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초기의 그런 분위기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간의 이해충돌 때문이었으나 이해충돌을 처리하는 각자의 자세도 문제가 있었다.
한중 수교체결전 홍콩특파원으로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한사람들은 한국사람들에게 우호적이었다. 평양냉면관과 단고기를 잘하는 유경식당에서 「남조선 동포」들은 북한주인과 종업원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특히 유경식당에서 피부가 하얀 「북녀」들로부터 당시 북한에서 유행하던 유행가「휘파람새」를 마이크도 대지않는 생목소리로 듣는 것은 「남남」들에게 있어서는 베이징이라야 가능한 색다른 추억만들기였다.
베이징의 북한대사관도 우호적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대표적 예가 북일 수교교섭의 북한측 대표였던 이삼로가 북일수교교섭 취재를 위해 베이징에 와있던 홍콩주재 한국특파원단에게 북한대사관에서 인터뷰를 갖자고 자청한 것을 들 수 있다.
베이징에서의 「남북밀월」은 그러나 92년 8월 한중수교와 93년 3월부터의 북핵문제 출현으로 깨져 버렸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이후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있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베이징주재 한국기자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며 다른 외국기자들이 보는 가운데 문전축객을 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한중 수교이후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는 한국식당때문에 북한의 식당을 찾는 경우도 점차 적어졌다. 귀임할 무렵 한동안 문을 닫았던 평양냉면관은 요란한 네온사인으로 새단장을 한채 신장개업했지만 수수했던 옛 모습을 잃고 오히려 천박해졌다는 느낌이었다. 북한의 표변은 베이징만큼은 자신들의 텃밭이라고 자신했는데 한중수교로 상황이 반전되자 상처받은 자존심을 지키기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속좁은 대응자세에 대한 실망감은 어쩔 수 없었다.
중국 국적의 조선족과 한국인들과의 관계도 수교 3년째로 접어들면서 서로 실망하는 관계로 접어들었다. 한국이 중국에 그처럼 빨리 정착할 수 있게 된데는 2백만 조선족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에게도 부유한 한국은 든든한 울타리이자 기회를 제공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가 상대방을 비난하는 상황이다. 조선족은 한국인들에 대해 돈좀 있다고 동족위에 상전처럼 군림하려한다는 것이고 한국인들은 일할 때는 중국인이고 대우받을 때는 동포를 내세운다고 불만이다. 최근에는 한국의 사기꾼들이 조선족을 등치는 경우도 많아져 서로간의 관계는 더욱더 악화될 조짐마저 보인다.
한중수교만 3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베이징에서 국적다른 한민족이 형성한 삼각관계는 같은 핏줄이라는 공통점을 확대시키기보다는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왔다는 이질적 측면을 도드라지게 하는 바람직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민족이라는 한울타리속에 이질감을 융합하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베이징을 떠났다.<유동희 기자> + 유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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