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 거리감 해소 통일도움”/민족의식·현지 적응능력 조화 필요/화해·단합 위한 행사 더많이 있어야□참석자
오길명씨 민단계 재일동포2세
김지영씨 조총련계 재일동포3세
해방과 동시에 찾아온 민족분단의 세월이 반세기에 접어들었다. 국제적인 냉전 붕괴이후 유일한 분단지역인 한반도에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변화의 조짐은 분단구조를 그대로 투영해 온 재일동포 사회에도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 각각 민단과 조총련에 「깊이」관련된 젊은 동포를 한자리에 모아 전환기를 맞은 동포사회의 의식을 간접점검해 본다. 오길명씨(33)는 교포2세로서 민단산하기관인 재일한국상공회의소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김지영씨(29)는 교포3세로 조총련기관지 조선신보사에서 일하고 있다.【편집자주】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느낀 어려움은.
▲오길명=일본학교를 죽 다니며 외로움과 차별을 겪어왔다. 어린 시절 주변의 일본아이들은 『싫으면 너희 나라로 가라』는 말을 수시로 해댔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을까』하는 원망도 많이 했다. 부모님으로부터는 늘 『학교에서는 절대로 일본애들한테 지면 안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집에서는 우는 얼굴을 보일 수도 없었다.
그런 유무형의 차별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켰고 강한 적응력을 갖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김지영=학교교육과정을 모두 조총련학교를 거쳐와 그런 식의 차별은 별로 겪을 기회가 없었다. 아무래도 윗세대에 비해서는 고생을 안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결혼 후 방을 얻을 때 어려움을 겪은 경험은 있다.
그러나 그런 차별보다는 한반도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편견으로 인한 어려움이 컸다는 생각이다.
―2·3세 동포들에 있어서 모국 또는 조국이란 어떤 것인가.
▲오=20여년 전인 국민학교 5학년때 처음으로 부모님의 고향인 경남 남해에 갔었다. 엄청난 문화충격을 받았다. 당시 전기도 없고 애들의 옷소매는 콧물과 때로 반질반질했다. 대도시도 엉망이었다. 복숭아통조림을 식칼로 따는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그러나 최근에는 일본과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을 만큼 발전했다. 고향을 떠나온 1세들과 달리 일본에서 태어난 2·3세의 모국인식은 모국의 발전수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내경험이다.
▲김=내 경우는 달랐다. 오랫동안의 조선학교 교육으로 일본인들의 편견에 감염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에서 조국을 접했다. 고3때인 84년 처음 원산항에 도착해 평양에 들어갔다. 그감격은 대단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은 배에서 내릴 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내린다. 12년간의 교육의 영향이지만 조국에 대한 순수한 경의의 표시다.
▲오=그것이 간단하지 않다. 피는 한국사람이지만 말도 문화도 일본사람이었다. 한국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안되겠다 싶어 스스로 결심해 26세때 연세대 외국어학당으로 유학가 우리말을 배웠다.
우선 살아남기에 바빴던 부모님세대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위해 두딸의 이름은 일본식으로 부르기 어렵도록 행선, 인선으로 지었다.
▲김=그러나 말과 이름만으로는 민족의식을 지킬 수 없다. 동포들의 민족의식은 릴레이식으로 이어져 왔다. 세대를 거칠수록 희석될 수 밖에 없다. 뭔가 새로운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오=그보다는 일본사회에 어떻게 적응해 잘사느냐가 보다 시급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귀화가 늘어나는 추세는 앞으로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식 이름과 우리말을 쓰면서 「한국계 일본인」으로 정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김=그런 추세는 분명하다. 그러나 민족의식은 중요한 것으로 지켜져야 한다. 일본사회는 특수하고 외국인에 대한 태도도 특수하다. 무엇보다 조국의 상황이 특수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정세가 조금씩 변화하는 조짐이 있는데….
▲오=모국의 정세변화가 심리적으로는 기대되는 바도 있지만 동포들의 실생활과는 사실 별관계가 없다. 우리가 살곳은 일본이다.
▲김=어디서 살것이냐를 따지자면 그렇다. 그러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조국의 존재의미를 생각할 때 조국의 정세변화는 중요한 흐름이다. 조국의 사정이 달라지면 동포사회도 달라진다.
최소한 서울과 평양을 오가지 못하는 분단상황은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오=통일이라는 말이 2·3세 동포들에 던지는 의미는 제한돼 있다. 기쁜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정도의 기쁨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친척이 남북에 갈라져 있는 경우는 정서적인 의미를 갖지만 어느 한쪽에 친척들이 모여있는 경우는 기대도 의미도 떨어진다.
▲김=현재 동포들의 일본생활자체가 완성형이 아니라 한시적인 것이라면 통일의 의미는 커진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는 평양에 계신데 내결혼식에 못오셨다. 내가 처를 데리고 가볼 생각인데 그런 상황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인만큼 개개인의 생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난번 지바(천엽)에서 열렸던 탁구대회에서 남북합동선수단을 응원하던 때의 감격처럼 공통된 것이 있다. 그런 정서적인 싹을 살리는 통일방향이 중요하다.
혼란이 있을수도 있으나 두려워 할 것은 아니다.
▲오=지바대회 당시 나도 일주일간 합동응원단의 일원으로 뛰면서 감격했다.그러나 통일이 돼도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생활기반이 없다. 일본서 잘살아서 모국을 지원하는 등 밖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 모국투자등 생각해 볼 것이 많다.
▲김=본국투자가 모두 경제적인 관점에서 이뤄지는 것은 곤란하다. 북한의 합영법이후 이뤄진 합영의 경우 돈많은 동포들이 투자한 것이 아니다. 영업실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국과의 관계맺음이 중요하다.
▲오=모국의 변화가 어떻든 변화를 위해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매년 하는 광복절행사도 이제는 딱딱한 연설장이 아니라 동포들이 함께 모여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김=동감이다. 지방단위에서 조총련과 민단의 공동행사는 많으나 중앙단위에서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중앙에서 동포들의 단합을 위한 대규모 행사가 기획돼야 한다.<도쿄=황영식 특파원>도쿄=황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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