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 요구·등위중 시국 정중동/전국서 대규모 반체제 격리작업지난 89년 6월 발생했던 천안문 사태가 오는 4일로 6주년을 맞지만 베이징(북경)의 외견상의 풍경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출퇴근 시간 때마다 시내를 뒤덮는 자전거 물결은 예나 다름없고 라오바이싱 (노백성:일반 백성)들의 표정에서도 긴장감을 감지할 수 없다.
6년전 1백만명에 가까운 시위군중이 모였던 천안문광장은 관광객과 연날리는 아이들로 북적거릴뿐이다.
그러나 평온한 겉모습과는 달리 6주년을 맞는 중국은 그어느 때보다도 긴장돼 있다. 사그라들 줄 모르는 최고실권자 덩샤오핑(등소평)의 위중설과 지난 4월말 전격적으로 단행된 천시퉁(진희동) 베이징시 당서기의 해임이 바로 「평온속의 불안」을 상징해준다.
올해도 예외없이 중국공안당국은 당시의 주역 수십명을 전국에서 예비검속차원에서 연행, 구금했고 경비도 대폭 강화했다. 반체제 인사들의 구금 연행 격리는 매년 치르는 통과의례이지만 올해는 예년보다 그 강도가 높다. 중국당국은 일찌감치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주역 왕단(26)을 비롯, 시인 황시앙(45)부부 ,장치성(47)등 십수명을 연행, 격리시켰다. 「위험분자의 격리작업」은 베이징뿐만 아니라 전국각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남부 광저우(광주)의 운동지도자 왕시저(왕희철)를 비롯, 우한(무한) 청두(성도) 시안(서안)등의 지방 인사들이 연행돼 구금상태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일부 베이징소식통들은 현재 베이징(북경)대 칭화(청화)대등 베이징시내 각 대학 학생지도자를 대상으로 집체학습을 실시하는등 사실상 개인행동을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탄압의 강도에 비례해서 반체제 인사들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한 것도 올해들어 두드러진 현상이다. 중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며 반체제 인사인 쉬리앙잉(허량영·75), 학생지도자 왕단등 지식인 45명은 당국의 연행·격리조치가 있기에 앞서 장쩌민(강택민)주석과 차오스(교석) 전인대 상무위원장에게 올해가 유엔의 「관용의 해」임을 상기시키며 ▲정치범석방 ▲천안문사태 재평가 ▲사상의 자유등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의 중국상황은 어느때 보다 심각한 불안요소가 잠재해있다. 덩샤오핑의 위중설은 그동안 중국안정의 추 역할을 해왔던 권력중심이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천시퉁 베이징시당서기의 숙청은 지도부내의 권력투쟁의 조짐으로 비추어져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천안문사태이후 중국지도부는 중국 인민들의 에너지를 경제발전쪽으로 집중시켜 오늘날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성공했으나 강요된 정치안정의 후유증을 이제 서서히 맛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과 지방간의 경제정책 방향을 둘러싼 대립, 빈부차, 도시와 농촌간의 발전격차가 심화되는등의 새로운 갈등양상은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심각한 불안요소로 발전한 상태다.
천안문 광장에서 한가롭게 날고있는 수백개의 연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밑에서 줄을 잡고 있기때문이다. 줄을 놓치거나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이 정중동의 중국의 현상황과 오버랩된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진압선봉 양상곤 “토사구팽”/진압반대 호계립 장관복권/천안문사태 주역의 오늘/지도부 「천안문갈등」 과 별개 부심/학생지도자 유강 지금도 복역중
89년 6월4일의 천안문사태는 당시 중국 지도부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체제인사들간의 갈등과 시위진압을 둘러싸고 벌어진 지도부간의 대립이 중첩되어 이루어진 비극이었다. 6년이 지난 현재 진압파, 진압반대파, 반체제세력 이들 3자간에는 적지않은 부침이 있었다.
사망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덩샤오핑(등소평)은 6년전과 마찬가지로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여전히 확보하고 있다. 당시 그는 당과 국가의 군사위 주석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으나 현재는 은퇴한 평당원의 신분이다. 그러나 그의 위상은 직책을 갖고있던 6년전보다 아무 직책을 갖고있지 않은 현재가 더 높다.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천안문사태 진압후 총서기직에서 전격해임된 자오쯔양(조자양·76)의 불운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나 등의 사망이 가까운 미래의 일로 다가오면서 그의 정치적 장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자오쯔양은 개혁·개방에 대한 기여, 일부 지방세력의 지지확보, 군과의 원만한 관계 등에 힘입어 최근들어 등 사후 과도기를 이끌 지도자로 복귀할 것이란 설이 강력하게 떠돌고 있다. 한동안 철저한 감시하에 놓여있던 그는 93년부터 베이징(북경)을 떠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자오쯔양등과 같은 진압반대파뿐만 아니라 진압파중에서도 상당수가 6년이 지난 지금에는 정치적 불운을 곱씹고 있다. 중국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 상무회의의 상무위원 7명 중 천안문사태 관련자는 리펑(이붕)과 차오스(교석) 2명 뿐이어서 정치 핵심권의 「탈천안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강경진압의 행동대장격 역할을 했던 양상쿤(양상곤)과 그의 동생 양바이빙은 현재 심한 정치적 불운을 맛보고 있다. 천안문사태의 강경진압 선봉에 섰던 양씨 형제는 등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했으나 92년 10월 14차 당대회에서 토사구팽 대접을 받은 것이다.
자오쯔양과 함께 진압에 반대했던 후치리(호계립)는 일찌감치 복권돼 지금은 전자공업부장(장관)을 맡고있는 반면 강경진압에 앞장섰던 천시퉁(진희동) 당시 베이징시장은 베이징시 당서기로 있다 최근 해임당했다. 6년전과 명암이 엇갈린 대표적 사례다.
한편 우얼카이시(오이개희) 왕단 등 학생지도자들은 외로운 망명생활과 연금 등 감시를 견디고 있으며 사건 직후 수배령이 내려졌던 21명의 학생지도자 가운데 유강은 아직도 복역 중이고 2명은 행방이 묘연하며 18명은 풀려났거나 망명 중이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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