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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변화의 현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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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변화의 현장:2)

입력
1995.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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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중국」 향한 통합열차 달린다/민족주의와 갈등 걸림돌 불구/“노대륙생존위한 대세” 굳어져유럽은 한 식구다. 그것도 대가족이다. 프랑스어로 유럽을 대문자로 쓰면 단순히 지리적인 뜻으로서의 유럽이 아니다. 거기에는 「통합유럽」이라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던 92년부터 3년간 유럽은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EC(유럽공동체)라는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93년 11월1일부터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에 따라 EU(유럽연합)라는 새 이름이 탄생했다. 문패를 바꿔단 것 뿐만이 아니다. 가족수도 12명에서 15명으로 늘어 났다.

지난 3월26일부터는 독일과 스페인,베네룩스3국등을 취재갈 때 여권을 잊고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국경의 검문소는 철폐됐다. 긴장감 대신 푸른 바탕에 노란 별 무늬의 EU기가 평화롭게 휘날렸다. 역내간 국경이동을 국내여행처럼 자유롭게 하는 셍겐조약이 발효됐기 때문이었다.

유럽시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일이다. 공항에는 EU국민들과 다른 역외국가에서 오는 여행객이 이용하는 출입구가 별도로 설치돼 있다. 그러나 다른 역외국민일지라도 한번 EU역내에 들어오면 다음부터는 역내이동이 자유롭다. 지난해부터는 도버해협을 잇는 해저 유로터널의 개통으로 유럽에는 더이상 섬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같은 외형적 변화가 반드시 유럽통합의 질적인 변화를 뜻한다고는 할 수 없다. 통합과 민족주의간의 갈등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유럽합중국의 꿈과 위대한 민족국가라는 상충된 꿈은 마스트리히트조약의 비준을 국민투표에 붙인 프랑스와 덴마크등에서 여실히 드러났었다.

그러나 유럽통합열차는 통합회의론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통합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 사람은 없다. 독일 콜총리와 함께 통합의 쌍두마차였던 프랑스의 미테랑대통령이 물러나고 통합에 다소 소극적인 시라크 우파정권이 들어섰다해도 그것은 통합의 내용에 대한 문제일 뿐 통합의 당위론에 관한 우려는 아니다. 시라크대통령이 취임식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유럽의회가 있는 스트라스부르로 달려가 콜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통합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였다.

파리특파원으로 부임한 첫해인 92년 미국에는 전후세대의 젊은 기수 클린턴대통령이 등장했다. 당시 르몽드지는 이런 기사를 썼었다.「누가 유럽의 트럼펫을 불 것인가」라는 제하의 자조적인 글이었다. 활력과 희망에 넘친 신대륙과 정체와 불안의 구대륙을 비유한 인상깊은 내용이었다. 미테랑이나 콜총리,스페인의 곤살레스 총리등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현재 노인성치매를 앓고있는 레이건 전대통령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집권한 냉전시대의 인물들이다. 영국도 대처에서 메이저총리로 승계됐지만 집권보수당은 16년째이다. 트럼펫을 힘차게 불 힘이 있는 지도자도 없었고, 트럼펫에 맞춰 춤을 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늙은 대륙 유럽은 분명 변하고 있다. 더이상 정체를 거부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사라진 공백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국제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 부패와 무능, 경제불황이라는 부정적 유산을 남긴 유럽사회주의는 퇴조하고 개인의 복지와 평등이 더이상 최고의 가치가 아닌 우파적 가치관이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의 정권교체와 「마니풀리테」라는 부정부패척결운동에서 비롯된 이탈리아의 정치 대변혁은 이같은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영국과 스페인은 40대 젊은 지도자들에 의해 곧 정권이 교체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미국과 일본과의 무역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경쟁력 향상과 아시아시장 진출에 운명을 걸고 있다.

초국가 「유럽」은 깃발처럼 그 실체가 존재하는가.「유럽」은 없고 독일과 프랑스와 영국만이 있는 것인가. 해답은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유럽에는 다양성 못지않게 동질성이라는 특성이 혼재한다. 유럽의 행로는 통합뿐이다. 국내개혁은 중간역이다. 멀지않아 유럽에 울려퍼질 트럼펫 소리를 기대한다.<한기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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