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화·민속·기예등 화려하게 펼쳐/「서구홍수」 속에 민족 잠재의식 일깨워오래전 읽었던 이효석의 작품 하나가 생각이 났다. 제목이 「장미 병들다」 였던가? 퇴폐적인 듯 하면서 도시적 감수성이 물씬 풍기는 그런 분위기였는데 그 책의 해설면에는 당시 무척이나 서구풍의 생활을 즐겼다는 이효석의 사진 한 장이 제시되어 있었다. 실내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고 검은 테 안경의 인텔릭한 풍모의 이효석이 의자에 걸터 앉아 있는 광경은 오늘 이 시대에 찍었다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세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효석이 멋과 여유로 추구했던 서구풍의 생활양식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존재방식 그 자체가 되고 있다. 이 현실들이 서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생활양식을 거부하는 일이란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짓만큼이나 무용한 일임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나는 좀 걱정스럽게 느꼈던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지난해 한+참 유행했던 「마법의 성」이라는 그 꿈같은 노래가 주범이다. 이 노래의 선율과 가사에 감동하고 환호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저렇게 조건없이 즐거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다. 동화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잠재의식에 뿌리를 둔 것인데 유럽식의 왕자, 공주는 우리의 경험에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젊은이들은 잠재의식까지 서구화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마치 화병에 꽂힌 꽃처럼 뿌리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인데, 이러한 나의 상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젊은이들은 정말 마법에라도 걸린양 그 노래에 도취된 듯 했다.
전통문화그림책인 「솔거나라」가 특별히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앞서의 우려와 관련하여 이 아동용 도서의 기획의도가 상업성보다는 진지한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리스 로마신화보다 먼저 마고할미신화를 통해 세계에 대한 조상들의 이해방식을 보여주고, 맛있는 빵과 케이크도 좋지만 그 이전에 계절마다 풍미를 살려 쪄냈던 갖가지 떡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시계, 물시계, 숨쉬는 항아리, 짐승, 강강술래, 고구려나들이, 말뚝이와 초랭이, 풀무와 시우쇠등 어른들조차도 이제는 가뭇해진 우리의 신화, 민속, 기예들이 동화와 그림으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이 시리즈는 오존층처럼 파괴되어가는 우리의 잠재의식을 지키려는 가상한 노력의 결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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