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이형구 전노동부장관의 산업은행총재 재직시절의 대출비리를 캐기 위해 가명계좌 3개와 이와 연결된 40여개 계좌를 추적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는 상당수의 차명계좌가 들어있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지 2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가·차명계좌를 이용한 뇌물수수와 비자금관리가 과거와 다름없이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물론 조사대상 계좌들은 대부분 93년8월 실명제가 실시되기 이전에 개설된 것들이지만, 그 이후에도 차명계좌의 형태로 계속 입출금이 이뤄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계에서는 이같은 비자금계좌가 어떤 용도에 쓰였는지에 대해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가·차명계좌의 입출금내역과 자금용도에 대해서는 검찰수사에 의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자금용도가 무엇이었는가와 관계없이 국민들은 배신감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됐다. 많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검은 돈」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었다. 공직자 재산공개도 금융실명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 그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실명제의 취지가 장관에 의해, 또 국책은행 총재에 의해 무색해지고 말았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비아냥했다. 그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자금추적을 얼마든지 따돌릴 수 있었을텐데 자칫 「방심」한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현행 금융실명제 아래서도 얼마든지 검은 돈을 숨기고 세탁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는 얘기가 된다.
금융실명제가 만능은 아니지만, 이전장관의 가·차명계좌 추적조사는 현행 실명제의 허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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