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내내 광주에서는 5·18기념행사가 이어졌다. 초순부터 시작된 각종 행사가 5·18을 전후해 절정에 달하고 26일에는 또 기념음악제가, 27일에는 전남도청앞에서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진혼제가 열린다.오월 이맘때가 되면 광주의 그날들이 머리속 가득 밀려온다. 15년전 5·18사건이 일어난 직후 광주에 가 있었던 10일간의 체험은 슬픈 추억의 단편으로 잠재해 있다가 그때가 돌아오면 함성처럼 되살아난다.
군과 시위군중과의 숨막히는 가두공방, 총성과 피로 물든 전남도청앞 광장, 통곡과 비명으로 아수라장을 이룬 병원사체실, 마지막날 도청안의 처절한 장면, 금남로에서 농성동에서 총알이 머리곁을 스쳐갔던 위기의 순간등….
불현듯 당시의 일지가 생각나 빛바랜 취재수첩을 꺼내본다. 그때의 기록은 한 학생의 죽음의 현장에서 끝나 있었다.
「80년 5월27일 상오, 전남도청안 도경종합상황실 뒤편. 꽃이 모두 떨어진 화단옆에 한 청년이 복부에서 피를 흘린 채 하늘을 보며 숨져 있었다. 군복상의에 갈색바지, 뒷주머니엔 조그만 수첩이 하나 꽂혀 있었다. 발밑엔 흰 운동화와 탄피가 흩어져 있고 머리앞쪽에는 철모와 총알이 뚫고간 둥근 쟁반이 뒹굴고 있었다」
서울 동국대 전자계산원1년 박병규(60년생)군으로 확인된 이 학생은 총성을 듣고 뛰쳐나오다 총탄을 과일쟁반으로 막으려했던 것같다. 무엇이 이 젊은이를 이곳에 오게 해 죽음에 이르게 했는가. 그의 죽음은 유난히 슬픈 환영이 되어 오랜 세월 뇌리에 파고 들었다. 「광주사태」당시 신군부에 의해 「폭도」로 불렸던 이 젊은이는 죽어서 이제는 「열사」가 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옛날의 광주사태는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으로 불리고 신군부세력이 지칭했던 「폭동」은 「시민항쟁」으로, 「폭도」는 「시민군」으로 바뀌었다. 죽어 묻힌 자는 망월동묘역의 열사가 됐다.
그런데, 겨울공화국이 지나간 지금에도 광주에서는 여전히 한의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5·18기념행사나 관련모임등에서는 진상규명, 관련자처벌의 주장이 계속 튀어나왔다. 특히 이번에는 관련자 기소촉구 요구가 잇따랐다.
세상에는 풀어야 할 한도 있고 묻어야 할 한도 있다. 광주의 한이 바로 그런 것이다. 5·18 15주년은 이제 광주의 남은 상처를 마저 아물게 하고 역사발전을 위한 용서와 대화합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이면의 외침을 일깨워주고 있다.<전국부장>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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