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은 춘사작품” 근거제시/인하대 홍정선교수 연변서 찾아내/문예봉·한설야·이규설 등 7인의 글실려/제작비 조달과 전후과정 소상하게 밝혀/치열했던 예술혼·인간적 풍모도 생생히광복 50년을 맞아 선구적인 영화인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춘사 나운규(1902∼1937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그의 활동과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하대 국문과 홍정선교수가 최근 중국 연변의 조선족자치주 도서관에서 찾아내 복사해온 「라운규와 그의 예술」은 나운규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납·월북영화인들의 글을 모아 나운규 탄생 60주년이 되던 62년 북한에서 펴낸 1백90쪽 분량의 회고집이다.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출판사(인쇄소는 평양도서 인쇄공장)가 발행한 이 책에는 인민배우 문예봉을 비롯해 공훈배우 심영과 한설야(소설가) 김련실 리억일 강호, 영화감독 리규설 등 나운규와 함께 영화를 찍거나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글 7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나운규의 치열했던 영화작업뿐 아니라 그의 숨겨진 인간적 풍모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최근 영화학계 일부에서 『「아리랑」의 감독이 일본인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는데, 이 책에는 「아리랑」이 나운규의 작품이라는 명백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20년대 부산에서 창립된 영화사 「조선키네마」시절부터 나운규와 함께 감독겸 배우로 일했던 리규설은 「그와의 10년 간 세월」이라는 글에서 「아리랑」을 제작한 전후과정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리규설은 『나운규에게 「아리랑」의 줄거리를 처음 들은 것은 1924년이며 「아리랑」을 만들기 위해 명동에서 모자가게를 하던 일본인 노파의 후원을 얻어 「조선키네마」를 설립하고 노파의 뜻에 따라 「농중조」라는 삼류신파영화를 만든 후 「아리랑」에 착수할 자금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아리랑」에서 실성한 주인공 영진이 입버릇처럼 외치고 다니는 『진시황도 죽었다지』라는 대사는 본래 『네 놈도 망할 날이 있다』였으나 검열을 의식해 바꿨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이 책은 또 나운규가 「윤백남프러덕션」에 몸담고 있던 시절(1925년) 『윤백남이 제작하는 영화 「개척자」가 원작자인 이광수의 민족개량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며 제작을 반대해 그와 결별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나운규의 인간적인 모습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가 열정적인 독서가였고 시대정신에 민감한 인물이었으며, 역경을 이겨내는 내면적 힘이 남달랐음이 실례와 함께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나운규가 당시 좌익운동그룹인 「카프」와 사상적인 유대가 깊었음을 강조하는등 나운규의 영화활동을 계급투쟁적인 측면에서 조명하려고 의도한 흔적들도 보인다. 영화학계에서는 북한이 60년대를 전후해 나운규 영화의 항일정신을 김일성의 전력과 연계시키기 위해 나운규 우상화를 시도했었다는 점을 들어 나운규의 활동과 사상이 다소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김경희 기자>김경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