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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마력에 국민적 열광 가속/프로스포츠(광복분단50년: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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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마력에 국민적 열광 가속/프로스포츠(광복분단50년:31)

입력
1995.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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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홍수환·김일등 권투·레슬링스타/80년대 야구·축구·씨름 출범… 전성기에/농구·배구도 폭발적 인기속 적극 추진프로스포츠는 자본주의 스포츠의 꽃이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종합대회의 금메달리스트들이라 하더라도 프로농구의 마이클 조던이나 프로축구의 마라도나, 로베르토 바조같은 프로스포츠 스타들이 누리는 인기와 명예와 부를 얻지는 못한다. 이는 프로스포츠가 그만큼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인데 프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스포츠의 실력과 국민의 수준,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경제력이 기본 요건이다. 한국의 경우 해방후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으로 볼때 프로스포츠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60년대 사회가 정상화되기 시작하면서 프로스포츠는 자연스럽게 태동기를 맞는다.

스포츠후진국인 한국에서 해방후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프로스포츠는 개인종목인 복싱과 레슬링이었는데 이들 종목은 당시 어려웠던 상황에서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았다. 50년대부터 꾸준히 맥을 이어온 프로복싱은 60년대 중반 김기수로 인해 인기의 절정기를 맞기 시작한다. 65년 1월 도쿄에서 열린 동양타이틀전에서 김기수가 일본선수를 KO로 제압하고 챔피언에 오르자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로서는 작은 집을 한채 살수 있는 거금 30만원을 금일봉으로 하사할 정도였다. 김기수는 66년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한국인으로서는 사상 처음 세계타이틀을 획득, 프로복싱의 열기에 불을 붙였다. 이후 한국프로복싱은 유제두 홍수환 염동균등 걸출한 세계챔피언을 배출하며 70년대 최고의 인기스포츠로 황금기를 구가했다.

프로레슬링이 당시 누렸던 인기도 대단했다. 박치기왕 김일을 비롯해 장영철등의 스타들이 각종 국제대회와 라이벌전을 잇따라 열면서 극적인 승부를 펼쳐 경기장엔 팬들이 넘쳐났고 TV 앞엔 꼬마부터 노인까지 모여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시청했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스포츠를 가장한 쇼임이 폭로되면서 몰락, 이젠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80년대 프로스포츠는 축구, 야구, 씨름등의 종목이 잇따라 프로화 하면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당시 인기스포츠의 갑작스런 프로화는 국민의 관심을 스포츠로 돌리기 위한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프로야구는 고교야구의 인기와 지역간의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지역연고제를 기반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스스로 감독이 되어 작전도 구상해보고 상황을 예측해볼수 있다는 야구종목의 특징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 했다.

82년 6개구단 1백44명의 선수로 시작한 프로야구는 출범 첫해부터 각종 화제를 일으켰다. 개막전에서 프로야구 최초의 역전결승 만루홈런을 날린 MBC(현 LG) 이종도, 한국시리즈 최종 6차전에서 승리의 만루축포를 터뜨린 OB 김유동, 경이의 22연승을 올린 OB 박철순, 22개의 아치를 그려내 첫홈런왕에 등극한 해태 김봉연, 일본서 활약하다 감독겸 선수로 돌아와 4할대를 때려내며 타격왕에 오른 MBC 백인천등 프로야구는 첫시즌부터 스타플레이어들의 탄생과 함께 인기를 누렸다.

이후 프로야구는 빙그레, 쌍방울 2개구단이 새로 창단되며 91년부터 8개구단으로 정착, 현재 14번째 시즌을 맞고 있다. 출범 첫해 정규시즌서 1백43만여명의 관중을 끌어 모았던 프로야구는 지난 2년 연속 4백만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고 빅게임 때는 표를 구하기 위해 경기장서 팬들이 장사진을 쳤다.

프로축구는 81년 할렐루야가 팀을 창단하면서 야구보다 한걸음 먼저 프로화를 시작했으나 후속팀의 창단이 늦어지는등 늑장을 피운끝에 83년에야 프로 4개팀, 아마 2개팀으로 구성된 슈퍼리그가 개막되면서 본격적인 프로시대를 열게된다. 그러나 지역연고제를 확립하지 않은 채 출범한데다 유랑극단처럼 떠돌아 다니며 들쭉날쭉 경기를 진행, 인기가 프로야구만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전북 전남 두팀이 새로 창단되면서 프로구단이 8개로 늘어난데다 연고지제가 정착단계에 들어서면서 프로야구와 프로스포츠의 양대 산맥으로서 인기 회복을 노리고 있다.

또한 민족 고유의 스포츠로 명맥을 이어오던 씨름도 프로붐에 편승, 83년 민속씨름으로 출범했다. 당시 경남대에 재학중이던 20세의 약관 이만기가 거구들을 차례로 꺾으며 모래판을 제압, 일약 스타로 떠오르며 큰 인기를 모았던 민속씨름은 이후 모래판에서 수많은 화제를 불러 모으며 민속 프로스포츠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이밖에 골프도 소득수준의 향상과 함께 고급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프로종목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사실 골프는 일제하에서도 한국인 프로가 일본대회에 참가하는등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빈약한 활동과 사회적 여건상 일반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골프 인구가 크게 늘면서 각종 대회가 창설되고 상금규모가 커지면서 프로와 대중스포츠로 발전하고 있다. 한편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겨울철 스포츠인 농구와 배구도 이러한 인기를 등에 업고 프로화를 추진중이어서 국내 프로스포츠는 다시 한번 획기적인 도약의 길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장래준 기자>

◎“프로선수는 몸값이 생명”/82년 프로야구등장후 억대들 줄줄이/90년대엔 유명우·최상호등 2억대도

프로스포츠 선수는 몸값으로 자신의 가치와 인기를 말한다. 70년대까지 운동선수라면 프로권투와 프로레슬링선수외에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다.

하지만 스포츠의 프로화가 급속히 진전된 80년대 들어 운동선수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씨름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았던 83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운동선수들이 1억원 가까운 목돈을 손에 쥐었다. 당시 프로선수로는 복싱의 장정구를 비롯, 야구의 장명부 축구의 허정무등이 각각 8천만원 이상의 몸값을 챙기면서 인기인으로 떠올랐다.

이후 80년대는 복싱의 장정구 유명우를 비롯, 야구의 선동렬 이만수 축구의 최순호등이 스포츠선수로서 고소득자로 꼽혔고 골프의 박남신 최윤수등도 고소득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이들의 몸값은 더욱 크게 뛰어 오른다. 91년에는 프로복싱의 유명우 문성길이 각각 2억원 이상의 대전료를 챙긴 가운데 92년에는 골프의 최상호가 상금및 후원업체의 보너스등으로 2억원 가까운 수입을 올리며 프로선수 수입랭킹 1위에 오르는 변화를 보였다.

특히 올해에는 야구의 선동렬 축구의 고정운 홍명보가 연봉만 1억원을 넘어섰고 인기가 솟고 있는 농구 배구등에서는 신인계약금으로 수억원의 돈이 오가는등 프로스포츠 스타들은 인기와 부를 한꺼번에 안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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