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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수필집 「깊은밤,그 가야금소리」/임지선 작곡가(요즘읽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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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수필집 「깊은밤,그 가야금소리」/임지선 작곡가(요즘읽은책)

입력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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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음악·양악 등 시공넘나드는 통찰/“가장 한국적인것이 가장 세계적” 제시황병기선생을 처음 뵌 것은 10여년전 미국에서였다. 내가 다니던 대학 동서문화연구소의 초청으로 열린 가야금독주회에서 단아한 한복차림으로 무대에 나온 선생은 가야금의 그윽하고 섬세한 음으로 청중을 매료시켰었다. 얼마전 그 분의 수필집 「깊은밤, 그 가야금소리」를 읽으며, 그 날의 가야금연주회에서 한 음 한 음을 정성스럽게 다듬어내던 선생과 상기된 표정으로 브라보를 외치던 나의 지도교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함께 천년세월을 이어온 전통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요즘 서점의 진열대를 가득 채운 좌절을 극복한 개인의 성공담 못지 않게 가치있고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선생이 해박한 지식과 명료한 문체로 우리의 전통음악은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안, 나는 우리의 통일신라시대로, 조선시대로, 그리고 구미각국으로의 시공을 초월한 음악여행을 하며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일승원음(한번 들으면 곧바로 진리의 세계에 달하는 둥근 소리)을 갈구하던 통일신라인들의 염원이 구현된 성덕대왕신종의 영겁의 소리가 아득히 들리는 것 같았다. 조선조 정철의 시조를 포함한 음악을 다루는 옛 문헌을 통하여 수백년전 선조들이 일구었던 예술의 향기와 정취를 감히 맛볼 수 있었다. 또한 타고난 천재성과 각고의 노력으로 주위의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이 시대의 음악가와는 달리, 철저한 조선조의 선비정신으로 일생을 도를 닦기 위해 음악에 정진했던 우리 전통음악인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게다가 근원적으로 다른 우리의 음악이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가진 서양사람들에게 감명을 준다는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시사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서양음악가들은 동양음악의 독자적 가치성을 인정하고, 몇몇 현대음악작곡가들은 동양음악 및 동양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새로운 음을 찾아 옛것을 파괴하고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작곡가들의 실험정신은 전위음악으로까지 이어지는데, 그 새로운 소리의 근원을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동양음악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인들이 다듬어온 음악문화를 소중히 가꾸어 전통음악에 뿌리를 둔 세계성을 가진 새로운 음악문화를 창조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재학시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은사님의 말씀이 이제야 알 듯 모를 듯 내 가슴을 파고 드는데, 이 한심한 후손을 선인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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